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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수 Dec 23. 2021

어디로 가야 하나

가장 행복할 시기에, 가장 힘든 정신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다른 공중보건의사 선생님들에 비해 복 받은 일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들은 선별 진료소, 예방접종센터, 방문 접종, 파견 등으로 이런 글을 쓸 짬조차 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중보건의사는 의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코로나 이전까지, 즉 내가 의대를 졸업하기까지는. 3년 동안 주어진 엄청난 양의 자유 속에서 쉴 수도 있고, 자기 계발을 할 수도 있고, 누구는 인생의 반려를 만나는 등. 물론 진료를 통해 지역의 공중보건에 기여함은 물론이다.

지금은 아니다. 자유의 깊이는 공무원이라는 또 의사라는 의료인이라는 족쇄에 말라붙었다. 민간 의사의 코로나 방역 업무 유도에 실패한 대부분의 지방 지자체들은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공중보건의사들을 말 그대로 '돌려쓰기'하고 있다.

그 시기에 내가 공중보건의사의 대표직을 1년간 수행하게 되었다. 대표직은 아주 평화로운 시기에도 힘든 자리인데, 공중보건의사의 수난시대에 지역의 대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자리인지. 내가 말하는 말 하나하나가 지역 공보의들의 의견이 되며 향후 수개월간 유지되는 정책이 된다. 거기다 모든 공보의들이 수행하는 선별 진료소나 예방접종, 지소 근무도 동일하게 해야 한다.

요컨대 이전의 공보의가 아닌데, 그 상황에서 내가 1년 동안 우리 시 공보의 선생님들의 대표가 되어 목소리를 모아야 했다. 과거형인 이유는, 이제 곧 대표직을 넘겨주기 때문이다. 2022년 2월부터는 다른 선생님이 대표가 된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공보의를 오기 전에 워드 2페이지에 걸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나열해 놓았는데, 지금 보니 공부 계열은 어느 정도 한 것 같다. 방송대 법학과 입학, 딥러닝/머신러닝 공부, JLPT N1 취득이 가장 큰 성과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외에 현대철학 논문도 이제는 읽을 만하고, 전공의 시험 책도 1회씩 풀어 보았고, 서핑도 배웠다. 예술계열은 아직 부족하다. 피아노 연습시간이 너무 적고, 사진, 피아노, 미술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2021년 초부터 내가 설정한 나만의 목표, 대표로서의 일, 공보의로서의 일이 겹치고, 훈련소도 10월에 다녀오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번 사람이 우울해지면, 생각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어떤 A라는 일을 두고, A에 대한 걱정을 넘어, A가 안 되면 어떡하지, 우리에게 나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등등 부정적인 사고의 전파가 이루어진다. 그런 생각에 일상이 짓눌리기 시작하면 결국 하루하루 이어가는 나의 루틴이 깨져버리고, 그 시간에 저런 걱정을 함으로써 내 일상은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나만의 힘으로 이겨내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코로나 환자가 나오지 않으면야 해결되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혹은, 쓸데없는 걱정을 인위적으로 그만하던가, 억지로 본래의 루틴으로 돌아가서 일상생활을 회복하거나. 정신과 대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울하지 않을 때의 생활이 100이라고 한다면, 나는 (특히 추울 때 악화되는) 우울감 때문에 100의 생활을 하지 못하더라도, 80 정도는 해내야 한다.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주지만 육체도 정신에 영향을 준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는 것은 정신과 육체 둘 다여야 한다. 정신은 정신과 약물로 보강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어느 정도는, 인위적이고 힘들지라도, 원래의 루틴을 찾아가야 한다. 루틴 속에서 쓸데없는 걱정에 대한 생각이 더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 방편 중 하나가 글쓰기이다. 루틴 안에 가벼운 글쓰기를 포함함으로써 나는 더 이상 걱정의 가지치기를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러한 상태에 있고, 내 이성은 이런 걱정이 자라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까닭은 계절에 따라 악화되는 우울감 때문이며,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코로나 블루건, 계절성 우울증이건 상관없다. 내가 원래 영위하던 생활로 천천히 찾아가자. 올해 초에도 이런 비슷한 위기가 있었는데, 결국 날씨가 풀리며 잘 이겨내지 않았는가. 손을 놓다시피 한 딥러닝 연구도 천천히 다시 시작하고, 피아노도 조금씩 새로운 곡을 연습해 보자. 지금 당장 100을 하긴 어렵다. 하지만 정신도 근육이기에 천천히 연습량을 늘리면 이번 위기, 아마 다음 늦가을에 찾아올 위기 또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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