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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오! 나의 예신님

 살면서 가장 많은 샘플을 받아본 시기가 있다. 2014년 봄, 결혼식을 준비하던 기간이다.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어떤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샘플을 많이 받아봐야 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실수가 있어선 안 되는 일.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한다. 실수나 실패에 너그러울 수 있는 건 샘플을 고르는 단계일 때뿐이다.


 청첩장, 식권, 예물, 스드메 패키지에 포함된 스튜디오, 드레스샵, 메이크업샵을 고르는 일, 결혼식 당일 하객들에게 대접할 뷔페 음식을 미리 맛보는 것까지. 약 3개월간 예신님(=예비신부님)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들으며 수많은 샘플을 보고 선택을 거듭했다.


 우리는 이제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는 날들이었다. 결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예비부부로서 함께 고생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정한 전우애를 가져본 시기였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커플이 크게 싸운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결혼식은 의무감으로 치루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이기적인 년이라고 거하게 욕을 먹고, 불효자가 되지 않으려면 결혼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준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결정을 돕지 않는 그에게도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결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암묵적으로 모든 선택은 내 몫으로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내가 화를 내지 않는 이상 싸울 일은 없었다.


 계획한 결혼식 날짜를 몇 개월 앞두고 그는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평일에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하고 함께해야 하는 일정은 모두 주말로 잡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결정은 둘이 함께한다는 모양새는 갖추자는 것이 그와 나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그의 신발을 맞추거나 예복을 피팅하는 일은 내가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말은 늘 바빴다.


 그는 금요일 밤이면 판교를 거쳐 서울로 오는 회사 통근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는 토요일 오전부터 주로 강남에 모여있는 각종 샵을 돌며 정해진 일정을 처리했다. 일정을 마치면 상도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짐을 내리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잠깐 자고 일어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다시 자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후 쓰러져 잤다. 눈을 뜨면 이미 밖은 어둑해져 있었고, 나는 파란색 75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투리 시간에는 청첩장 샘플을 보거나, 청첩장에 넣을 문구를 정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연락을 했다. 청첩장을 한 장 한 장 접어 봉투에 넣고, 각자 필요한 수량을 나누었다. 결혼식 당일 친구들과 친척들의 역할을 나누고, 누구에게 짐을 맡길 것인지, 누구의 식권을 챙겨달라고 부탁해 둘 것인지, 양가 어머니의 한복을 새로 할 것인지, 시어머님은 형님 결혼식 때 입으셨던 한복을 다시 입고 우리 엄마만 새로 할지 대여를 할지, 아니면 그 둘의 절충안인 맞춤 대여를 할 것인지 정하는 일도 있었다. 결혼 서약에 쓸 내용도 정하는 것도 물론 우리의 일이었다.


 물리적인 시간도 없었지만, 데이트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좀처럼 어딘가에 가고 싶어 하는 일이 없었고, 나는 평일에도 예신의 의무를 다하느라 (광장시장에 폐백 음식을 보러 가거나, 신혼여행 일정을 조율하고 네이버 카페를 뒤지며 여행 준비를 하는 등) 늘 지쳐있었다.


 아침 일찍 만나 종일 함께 돌아다니며 온갖 선택을 하고,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지고, 잠에서 깨면 어둑해진 하늘 아래서 오늘도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헤어져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주말이 끝났다. 우리는 결혼식이라는 결전의 날을 향해 함께 전진하는 전우였다.


 결혼식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남편이 깜짝 이벤트로 몰래 준비한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결혼 준비를 도맡아 하느라 고생했다는 남편의 말에 “원래 남자들은 결혼식 날 입장만 하면 되는 거야. 나도 그랬어.”라며 배를 내밀고 웃는 남편의 직장동료에게도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자신의 헤어와 메이크업이 맘에 들지 않아 잔뜩 화가 났지만,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꾹 참았다(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사람들은 우리의 앞날을 축하해주었고, 그날의 우리가 참 행복해 보였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의 결혼이 성공적이지 못했을 뿐이다. 때로는 샘플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점쳐볼 수 없는 선택도 존재한다.


 우리의 실패가 시작된 것이 언제였을까. 가끔 기억을 더듬어보곤 했다. 수많은 샘플을 보고, 실패하지 않을 만한 선택을 하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중요한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의 전우애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더는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쨌거나 이제 됐다. 이제는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효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예신님이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며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테니. 인생의 커다란 한 단계를 지나온 것만으로 충분히 애썼다고, 마음으로 나의 등을 두드리며 오늘도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나를 위해 같이 싸워야 한다.



1. 우리가 아이를 가졌더라면 두 번째 전우애를 가져볼 수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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