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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16:58

 오후 8 50, 아이폰 배터리가 55%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상회의 앱으로 진행되는 블라인드 데이트 프로그램이  시작인데,  시간 넘게 버틸  있을까. 비디오를 켜지 않으니 괜찮으려나.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고 1분마다 잔량을 확인하며 허둥댔지만 결국 아이폰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이패드와 마실 물을 챙기고 침대 위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오후 8 55. 혹시나 도중에 연결이 끊어지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에 에어팟 대신 유선 이어폰을 꽂고 사전에 받은 링크로 접속했다.  이름, 나이, 얼굴, 직업  어떤 정보도 모르는 상대들과 목소리만으로 대화하게  것이었다. 대화는   ,  세션은 16~18분간 진행된다, 휴식 시간은 3분씩 주어진다, 나이, 거주지  신상 정보는 공유하지 말아달라, 모든 대화가 끝난  설문지에 답변한 내용으로 매칭이 이루어지니 상대의 닉네임을  기억할 ... 호스트의 설명을 들으며 세션 시작을 기다렸다.


  상대의 대화명은 “메롱이었다. 대화명을 확인하고 나니 이제 정말 모든 기대를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난 일말의 기대감을 부스러기까지 쓸어모아 원기옥으로 만든  지구 반대편으로 힘껏 던졌다. 남은 시간은 16 58.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기다려야 하나 먼저 말을 해야 하나... 숨소리도 삼키며 고민하던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로켓처럼 쏘아 올린  마음은 이미 우주를 향해 날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대화명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촉촉한 미성의 음색이 싱그러웠다. 그의 입속을 구르다 튀어나온 단어들이 통통거리며 바닥에서 튀어 오르고 공중을 돌며 단숨에  귀까지  닿는  같았다. 귀에 도달한 음표는 달팽이관을 타고 돌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귀가 간지러웠다가 순간 어지럼을 느꼈다.


 야호!  상상  인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마음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가득 찼다.  명이 있으면  ,  명도 있겠지.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과 안도감에 마음이 구름처럼 일렁였다.


 사랑을  기적이라고 하는지 새삼 실감하는 날들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상대 역시 같은 마음을 갖게 되어 연인이  가능성이란 얼마나 희박한 확률일까. 너와 나인 동시에 “우리로서도 존재하게 되는 신비.


 나의 경우 사랑에 빠지기 위한  번째 필수 조건은 목소리이다. 어린이 시절부터 “목소리  앓아왔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마음이 가질 않고, 반대로 아무리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어도 목소리에 반하면 정신없이 빠져버리는 치명적인 병이다. 기적을 바라면서 이런 불치병까지 가진  처지가 슬펐지만 선명한 취향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자신을 어쩔  없었다. 목소리만으로 대화하는 블라인드 데이트 프로그램을 선택한   때문이었다.  기대는 없었다. 내가 바라는  기적이니까. 그런데  대화에서 이런 목소리를 만나다니.


 호스트가 미리 제시한  대화의 주제는 “2021 올해 목표였다.

 “혹시 올해 목표로 정한  있으신가요?”

 그의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을 음미하며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아이패드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 저는요...”

 벌렁거리는 숨을 꿀꺽 삼키고 긴장 속에서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가 공감의 말을 건넬 때마다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모든 세포가 귀로 달려가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건 토크 콘서트가 아니야... 지금  사람은  위한 공연을 하고 있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라, 말을 해라...


 “정말 죄송해요, 잠시만요. 기사님 여기서 우회전해주세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팽팽하게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순간 놓쳐버렸다.

 “택시 안에서 통화하고 있었던 거에요?”

 상상도   상황에 웃음이 터졌다. 그도 따라 웃었다.


 미니 핀이지만 미니하지 않은 몸집의 반려견, 2 3 동안 휴대폰을   방의 구조를 바꾸고 책을 읽으며 보낸 그의 새해, 5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가족들과 과메기를 먹으며 보낸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하고 들으며 우리는 많이 웃었다. 화면도 보지 않고 신나게 대화하던  갑작스레 세션이 종료되어 우리는 인사도 나누지 못한  헤어졌다.


 이어진  번의 세션에서 멋진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만날  있었지만, 그와 보낸 20분만큼 즐거운 대화는 없었다. 나는  대화로 잔뜩 신난 나머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며 흥분 상태였지만 대화가 거듭될수록 점점 차분해졌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활발하시네요라는 평가를 들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직업의 고충에 대해, 작년에  에세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낯선 사람들과 목소리만으로 만나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없었고, 닥쳐온 질문에 대답하고 다시 질문하며 대화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순간의 기쁨과 실망이 선명하게 느껴질수록 내가 원하는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도 점점 명확해졌다.


 둘만의 대화가 이어지며 우리는 그날 밤의 즐거운 대화가 앞으로도 계속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제한 시간 없이 대화하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목소리 외에도 그가 가진 아름다움이 많기에 나는 안심하고 그의 목소리를 누릴  있다. 건강한 몸과 단단한 마음, 집중하는 눈빛과 다정함,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


 그의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하고 소중히 대할  있을 때까지,  역시 그에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일  있는  날까지, 우리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충실하게 행복할 것이다. 숫자가 아닌 서로의 마음을 지켜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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