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이밍.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표현이다.
00에 어떤 말을 넣어도 그건 정답이다.
요리는 타이밍 - 고기를 굽더라도 너무 오래 익히면 타고, 부족하면 덜 익으니까. 적당한 타이밍에 뒤집고, 불판에서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연애는 타이밍 - 상대방과 나의 마음이 적당한 접점에 이르렀을 때 고백해야 성공 확률이 올라가니까. 때론 잠깐의 망설임 때문에 고백할 기회조차 놓치고 오래오래 후회하기도 한다.
성공은 타이밍 - 성공하는 데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타이밍을 포함한 운이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확실한 건 일을 크게 망치는 데도 타이밍은 중요하다.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비트코인으로 크게 망한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한 것 같다.
나는 오늘 2주 동안 참았던 빵을 사러 갔다. 그런데 먹으려던 빵이 없었다. 메뉴를 바꾸면서 없어졌다고 했다. 그동안 참았던 것이 후회됐다. 그래서 오늘은 3일 동안 참고 있던 치킨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비를 뚫고 가서 치킨을 사 왔고 완닭했다. 앞으로는 너무 오래 참지 말아야겠다.
#오늘먹을빵을내일로미루지말자 #영영못먹는다 #그래도치킨은먹었어 #오랜만에완닭 #왤케피곤하지
태풍이 와서 엄청나게 비가 쏟아진 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많은 반향을 일으킨 게시물이다. 글을 보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락을 해왔다. 인스타그램 댓글, 카카오톡, 만나서, 혹은 전화로. 좋아요나 댓글로 지나가는 평소의 게시물과 달리 여러 사람에게서 직접적인 연락이 오게 만들었으니 내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에서는 반향을 일으켰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것 같다. 그 글에 대해 어떤 소감을 말했는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든지 “야 치킨은 웬만해서 없어지지 않아. 살쪄. 좀 참아.”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좋아하던 빵을 먹을 수 없게 된 실망과 상실감을 치킨으로 훌륭하게 극복하고 삶의 교훈까지 얻은 모습에 감명을 받고 뭐라도 한 마디 건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날 나의 깨달음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아끼면 똥 된다”가 될 것이다.
올봄 회사 앞 건물에 새로운 가게가 문을 열었다. 낮에는 빵을 파는 베이커리 카페, 저녁에는 와인바가 되는 공간이다. 맛이나 보자며 간식으로 빵을 사다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회사에서 간식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빵을 샀고(내가 사러 간다), 혼자, 회사 직원과, 친구들과 같이 등등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가게에 자주 들렀더니 직원들이 나를 알아보게 되었다. 어떤 날은 빵을 하나 사고 직원이 포장하는 동안 같이 간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빵 봉투를 전해 받았는데, “하나 더 넣었어요. 너무 자주 오셔서...”하면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너무 자주 오셔서 감사해서 서비스를 드리니 더 자주 오라는 건지, 월급을 다 빵값에 쓰는 거 아니냐며 내 엥겔지수를 걱정해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왜 미안해하는지는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게 내의 거의 모든 직원이 다 나를 알아보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주머니 사정과 뱃살 사정 등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고려해 가급적 빵을 자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주 넘게 에그마요와 초콜릿 무화과 스콘을 참았다. 일주일간의 고행 같았던 재택근무를 마치고 다시 출근한 첫 주, 자신에게 상을 주기 위해 가게를 찾은 것이 그 날이었다. 그런데 먹으려던 빵은 하나도 없고, 앞으로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껴 쓰는 마음이 있다. 무한정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을 때 마음은 행동한다.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잘 쓰고 싶은 것이다.
3주 가까이 빵을 참았던 것은 아껴 쓰는 마음 때문이다. 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늘상 먹고 싶은 것들은 밀려있는데, 바로 회사 앞에 위치한 가게는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에그마요를, 초콜릿무화과스콘을 원할 때마다 찾아간다면 (실제로 원할 때마다 찾아갔었다) 내 월급과 내가 유지하고 싶은 몸 상태와 멀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나에 꽂히면 앞만 보고 돌진하는 경주마 같은 나 자신을 길들이기 위해, 내게 너무 한정적인 인내심과 월급을 더 잘 쓰기 위해 했던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스콘을 먹는 즐거움을 잠시 아꼈더니 다신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철 지난 유행어처럼 느껴지는 지금, 하루의 무게는 이전보다 조금은 더 무거워진 것 같다. 한정된 자원을 운용해서 죽을 때까지 잘 살아나가야 하는데 남은 시간은 너무 길다. 늘어난 평균 수명은 사람을 좀 더 쫄보로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우리는 부모들보다 더 오래 살게 될 테니까.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충분한 것 같지가 않다. 남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선택에 좀 더 신중을 기하게 만든다.
웬만해서 고민을 잘 털어놓지 않는 동생이 이직 문제로 너무 갑갑했던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은 인생이 걸린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른을 갓 넘긴 동생의 남은 시간은 나의 남은 시간보다 길 것이다. 그만큼의 무게가 동생의 선택을 더 비장하게 만드는 것일까. 한 번의 선택에 70년의 무게를 얹어 고민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된 일일까.
타이밍과 선택은 이인삼각을 하듯 서로의 다리를 묶은 채로 함께 온다. 적당한 시기에 최선의 선택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를 더 무겁게 한다.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엔 선택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다른 것을 선택할 기회는 또 온다. 에그마요와 무화과 초콜릿 스콘을 먹지 못하게 된 내가 치킨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