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사의 환자일기 시리즈 3
두 번째 재발 후에 다시 대구로 내려와 약 열흘 남짓 집중적인 치료를 했더니 통증이 줄어들고 걷는 것도 제법 좋아졌다. 고관절통증과 보행장애만의 문제라면 앞으로 꾸준히 좀 더 치료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통증기능분석학회에서 '만성통증의 해결'에 관한 강의를 부탁받고 강의자료를 준비 중이었다. 당시 내가 먼저 환자분께 얘길 했는지, 환자분이 어찌 알고 내게 얘길 했는지 글을 쓰는 지금으로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어쨌든 환자분은 일요일 아침에 서울 성모병원에서 열리는 통증 관련 학회에서 내가 하는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하셨다. 어쩌면 만성통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평화로운 지구별 여행을 위한 필수 준비물은 "세상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고통은 내 생각대로 세상과 나를 보는 데서 시작한다.
내 생각은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어린 시절, 사회적으로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23일(목)
OOO님)
안녕하세요. 원장님!!
7일부터 비교적 (좋아졌는데) 오늘 컨디션이 제일 좋아요.
처음엔 온몸을 공격당하는 것처럼 다 죽을 것 같았고 중간에 왔다 갔다 기복이 있었어요.
그런데 통증이 줄어드니 걷는 것도 좀 편해졌어요.
치료 안 하고 싶다고 한 거 캔슬 할게요. 헤헤헤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새벽까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통증도 걷는 것도 좋아지니까 죽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이제 맨발 걷기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원장님이 저보다 피곤해 보이시던데 원장님 건강도 돌보시면서 하세요.
최근에 행복한(재활의학과) 자주 다니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요.
환자가 좋아져야 행복하다는 원장님의 운영 철학처럼 저도 100% 좋아지는 걸로 행복하게 보답 드릴게요.
그리고 학회는 지금 제 상황과 딱 맞는 내용일 것 같아 급 관심이 생겼었어요.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환자들과 함께하는 기회가 있을 수 있으니 너무 괘념치는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당.
나)
그렇게 힘을 내주셔 감사해요.
확인되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자신이 통증에서 회복하여 나도 행복하게 해주겠다니 정말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 병원의 모토가 "당신이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해요"인데 우리가 행복하려면 환자분이 먼저 행복해야 되는 것이다.
통증의 실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의사들 대상의 강의에까지 참석해 보겠다는 것은 얼마나 간절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용기인가!
통증기능분석학회의 행사 운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치료 중인 만성통증 환자분인데 제 강의가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 학회 강의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학회 운영진은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전공의 시절 가난했던 터라 가끔씩 회비도 내지 않고 학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도강인 셈이다. 이번엔 내가 환자분께 도강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것이다.
역시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참 감사했다.
사실 DOCTOR라는 글자의 앞 글자 DOC는 가르친다는 뜻이다. 원래 의사는 질병에 대해 환자에게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언제부터인가 의사는 문제(질병)가 터지고 나면 사후처리(치료)하는 직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대의료가 질병치유에 극적인 치료결과를 내는 분야도 많지만 왜곡된 분야도 적지 않다. 나는 그중 의사가 본래 사명과 멀어진 것이 큰 원인이라고 본다. 질병이 왜 발생하며 사전에 어떻게 예방할 것인지를 알기 쉽게 알려주는 기능이 의사들에게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 의료를 왜곡시키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이 사후치료 위주로 짜여진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넋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만성통증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을 3년간 약 30권 정도 되는 통증에 관한 책뿐 아니라 뇌과학, 명상,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룬 심리학, 불교철학, 서양 영성가들의 책, 동양 사상에 관한 책과 논문을 읽고 환자들에게 적용해 보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나는 만성통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통증 때문에 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온 가족의 삶이 파괴되는 상황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함께 겪어왔다.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 환자로 인해 가족들이 노심초사하며 통증의 쇠사슬에 함께 뒤얽히는 고통스러운 현장을 보았다.
환자를 돌보는 부모나 배우자, 또는 자녀들이 우울증 약을 먹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그들도 삶에 의욕을 잃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지켜주던 통증이라는 감각이 '고통'이라는 괴물로 성장하여 내 환자들을 생각이란 쇠사슬로 묶어서 자신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그곳이 지옥문이라 하더라도 막아서고 싶었다.
내 환자들을 끌고 가는 그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그 괴물의 멱살을 잡고라도 그놈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 싶었다.
하늘이 내게 준 환자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연구하고 실제 환자들에게 적용하면서 만성통증이 고통으로 변질되어 삶이 엉망이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었다.
그리고 감정의 뒤에는 '자아'에 대한 낡은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문제를 가장 잘 파헤친 분은 붓다였다.
그가 살았던 2,500년 전에는 지금과 같은 생리학, 병리학, 유전학, 뇌과학, 심리학, 생명공학, 양자역학 등이 전무했던 시대고 여전히 신화와 종교적 서사가 사람들의 삶과 병,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프레임이었다.
붓다는 마치 이론물리학자가 실험도구 하나 없이 통찰과 몇 가지 수식으로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것처럼 인간의 감각과 의식, 감정과 고통에 대한 문제를 정교하게 파헤치고 세세하게 그 고리를 해체하였다. 그는 생사와 고통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여 깨달은 자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이 그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거나 죽지 않고 영생했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더 깊이 하는 것은 어려우니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초기 불경 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여 강의의 제목을 "세 번째 화살의 비밀"로 잡았다.
첫 번째 화살은 감각으로서의 통증(통각)
두 번째 화살은 인식으로서의 통증(통증)
세 번째 화살은 감정으로서의 통증(고통)
<그 당시의 강연 영상 도입부 : 통증과 고통, 치료와 치유>
https://youtu.be/vrE4UqI_6OU?si=cUdGG4ps1Up2NiAm
만일 이 환자분이 '자아'에 대한 낡은 개념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죽고 싶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분이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