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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Sep 25. 2024

대환장파티에서...5화(2)통증의 민낯 보기 그 첫걸음

동네의사의 환자일기(3)

만일 이 환자분이 '자아'에 대한 낡은 개념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죽고 싶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분이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원했다.


좀 뚱딴지같지만 나는 환자분이 만성통증에 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만 있다면 만성통증에서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환장파티에서...5화(2)통증의 민낯을 보기 위한 첫 걸음


2023년 11월 24일(금)


저 위대한 수피즘의 아름다운 시인 잘랄루딘 루미처럼 매일 그 통증을 환영할 수는 없더라도 밀쳐내며 저항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통증을 환영하는 수행자는 고대의 고행 전통이 만연한 사회라면 모를까 현대에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저항하는 것은 통증에게 더 힘을 실어주어 그 녀석이 내 몸에 더욱 각인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정말 그것만큼은 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목이 마른데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통증에 저항하는 마음은 통증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오히려 통증의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 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처음 병원에 오신 환자분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환자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의사와 신뢰관계가 쌓였을 때 조심스럽게 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 환자분도 몸이 좋아지고 나니 비로소 여유가 생긴 것이다. 


몸을 치료하지 않고 이런 마음의 문제로 접근하면 아예 치료를 시작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의사는 감정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만 환자가 듣기에는 자기가 별것도 아닌 통증에 대해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것처럼 비난하는 말로 들릴 가능성이 크다.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치고 온전한 자존감을 유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치료하는 사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만성통증 환자는 자칫하면 정신과 약물이나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기가 쉽기 때문에 초반에 적극적으로 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분은 이전에 힘든 상황에서 용기를 내셨던 분이라 내 강의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학회 운영진과 소통한 후 환자분의 참여를 비공식적으로 허락받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

조용히 들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시네요. 



OOO님)



안 그래도 회비가 궁금했는데 현장 결제군요. 

알아봐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원장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니...



나는 비공식적인 참여로 도강을 허락받았는데 환자분은 회비를 정식으로 내려고 마음을 먹고 계셨다.


통증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분이 참여하여 들어보겠다는 마음이 정말 귀하게 느껴졌다.



OOO님)


안녕하세요. 


일요일 원장님 강의만 들을 수는 없는 거지요?

아님 첫 차 끊으려 해요. 


의사분들 대상인데 다 들어도 감사한 일이라서요.

의학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너무 설레요.


감사합니다. 



나)


처음부터 들으셔도 되고 골라 들으셔도 됩니다.


편하신 대로 하시면 돼요. 



OOO님)



첫 차 빼고 매진이라 첫차 끊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이틀 뒤면 통증의학을 전공하는 의사 400명을 대상으로 실험적인 통증 이야기를 하게 된다.


통증기능분석학회에서는 특별히 나에게 시간을 많이 배려해 주었다. 


무려 90분!


일반적인 학회 강의는 보통 30~40분 정도인데 거의 두세 배의 시간을 할애해 준 것이다.


그런데 막상 통증에 대한 감정과 자아의 개념에 대해 강의를 하고 그 사례들을 함께 소개하는 것은 한 시간 30분도 모자랐다.


강의록을 정리하다 보니 도저히 한 시간 30분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모의 강의를 해보니 무려 두 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제일 못난 강의가 바로 시간을 못 맞추는 강의라는 것을 워낙 잘 알고 있었다. 남은 이틀 동안 최대한 정제하고 정제하여 한 시간 30분 이내에 강의를 마무리해야 했다.



통증을 전공한 의사들이라 해도 통증의학에 심리학, 뇌과학, 명상, 영성을 융합한 강의는 낯설 테니 최대한 쉽게 설명해야만 했다. 최근에는 심리학, 뇌과학, 명상과 영성에 관한 이론들이 점차 통합되고 있다. 


2,500년 전 석가족의 깨달은 자는 마치 이론물리학자처럼 아무런 실험도 없이 오로지 통찰지(한자어 반야般若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prajnā, 팔리어 판냐paññā)만으로 이런 지혜를 깨달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뇌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다양한 장비와 이론체계들이 갖춰지면서 이제서야 붓다가 깨달았던 그 지혜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통증을 처리하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

https://youtu.be/7H61qdvCvsA?si=j1iV41ML73_Y1WyD


하지만 나의 앎은 아직 서툴기 그지없어서 세 가지 자아의 개념, 감정이 통증과 연결되는 고리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분들에게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환자분은 내 강의를 듣는 게 설렌다고 했지만, 나는 강의를 뾰족하게 갈아서 시간 내에 최대한 잘 전달하려니 머리가 팽팽 돌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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