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에이전시 생활 회고록 #01
디지털마케팅 에이전시에서 10년 가까이 구르고, 이직에 이직을 거듭하다 이제서야 브랜드에 재입성을 하였다. 마케팅이라는 직업 자체가 사람을 늘 지치고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나는 꽤 내 직업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싶은 열망은 더 나은 마케터가 되고자는 목표로 옮겨갔다.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도 직업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케팅 에이전시를 다니며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근 대한항공 조현민 갑질로 수면 위에 오른 사건이 그러했듯이 마케팅 에이전시에 있으면 늘 부당함에도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었다. 오랜기간 지나다 보니 10년 가까이 갑에게 굽혀온 허리는 그래도 참을만한 아픔이었다. 더 아픈것은 마케팅 업계에 만연한 부당한 처우와 마케팅 선배들의 책임지지 않는 태도였다.
회사는 곧 나이며, 나는 곧 회사였다.
첫번째 마케팅 에이전시 C사
한 때 검색광고 분야로 국내 투톱을 달리던 회사다. 꽤 오랜기간 재직한, 친정같은 곳이었다. 회사 창업자가 CEO이며, 그의 아내가 이사로 있었다. 입사때는 180명 가량이 일하고 있는 회사였고, 해를 거듭할수록 인력규모는 점점 작아졌으나 매출은 점점 더 높아졌다. 나는 그 중에서도 신규사업인 콘텐츠 마케팅 분야를 맡았다. 당시만해도 콘텐츠 마케팅이라는 말이 생소할 때였고, '바이럴'이라는 명칭으로 통칭될 때였다. 동네 치킨집, 구멍가게부터 프랜차이즈, 각종 중소기업이 주 클라이언트였으며 블로그, 카페, 상위노출, 체험단 등등 여러 종류의 상품들이 있었다. 나는 운좋게도 입사하자마자 대기업의 기업 블로그와 SNS를 운영하고 글을 썼었다. 이제 막 국내에 트위터가 활성화되고 파워블로거가 생겨날 때였다. SNS가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 운좋게 나는 그 업계에 발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블로그로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수많은 상을 탈 수 있었다.
회사는 나를 무척이나 아꼈다.
사원-주임-대리-과장-파트장-차장-팀장까지 거의 매해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인사평가에서 S와 A를 번갈아 받았으며, 창업이래 이렇게 높은 연봉인상률은 내가 유일하다 하였다. 팀장이 아님에도 대표와 이사는 팀장들만 받는 선물과 혜택들을 줬다. 그렇게 회사의 사랑을 듬뿍 받고있던 나이므로 성과로 보답했었다. 대리때부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대기업 광고주 임원들 앞에서 제안PT를 하고 큰 액수의 광고계약들을 성사시켰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해서도 태교는 커녕 만삭의 몸으로 매일 야근을 하며 일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었다. 출산휴가 직전에 대표가 바뀌었지만 바뀐 대표도 나를 인정하여 출산 후 복귀를 기다린다 하였다. 회사는 곧 나이며, 나는 곧 회사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출산 4개월 후 자진하여 복귀했다. 그렇게 회사에 돌아가면 금방 내 삶을 되찾을 수 있을줄 알았다. 연이었던 브랜드의 러브콜들을 거절하고 이 곳에서의 워킹맘 생활을 택했다.
에이전시 마케터는 워킹맘을 할 수가 없다.
겨울, 목도 못 가누는 갓난쟁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복귀를 했다. 때마침 연간비딩건이 몰려 수많은 제안서를 쓰고 수없이 PT를 했다. 다섯건을 연이어 비딩에 성공하고보니 어느덧 봄이 왔고, 매출도 삶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생각했다. 어느 정도 출퇴근시간에 대한 가늠이 되어 아기를 돌봐주시던 시어머니도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본격적으로 워킹맘의 1막을 시작할 무렵, 첫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모세기관지염
3월부터 동네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작한 아기에게 병이 찾아왔다. 태어난지 반 년 겨우 넘은 아기가 어린이집에서 적응하는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이집 생활도 친구들과도 적응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눈에 보이는 생활만이 다가 아니었다. 아기는 매일 매일 친구들이 엄마아빠에게서 뭍혀온 바이러스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목도 못가누는 아기를 어린이집으로 밀어넣은게 내 탓이고, 아픈것도 다 내 탓 같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밤새 40도 가까이 열이 나는 아기를 눈물콧물 범벅이 되가며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해열제와 물수건으로 열이 떨어지고 오르고를 반복하며 그렇게 뜬 눈으로 꼬박 밤을 보내고, 출근시간이 되었다.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은 카톡 한 줄로 상사에게 연차 허가를 받고, 나는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가관이었다.
_아기 키우면 다 그렇게 아프고 하던데? 어린이집 맡기고 오후 출근하세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제일 서러움이 밀려온 순간이었다. 내 몸 아플때도 그렇게 서럽지는 않았다. 내가 그동안 그 회사에 갖다바친 광고주가 몇인데 단 하루도 용납이 안된단다. 그 날 아기는 결국 모세기관지염으로 입원을 했다.
사라진 청춘
그 때부터 나는 이직을 준비했다. 마케팅 에이전시라는 직장과 마케터라는 직업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깨지기 시작했다.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적당한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매일 같이 접속했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그 일이 있고, 3개월이 채 안되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 바뀐 대표와 그룹사의 횡포였다. 회사에 대한 분노를 채 토하기도 전에 그렇게 나의 젊음을 바친 회사는 흔적도 없이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