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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 서정시 May 18. 2018

멀쩡한 회사가 망한다는 것

마케팅 에이전시 생활 회고록 #02

회사가 어렵다

1주차 : 1차 통보_너희만 알고 있어라

팀장급 이상들에게만 공유된 회사의 어려움. 임원진들은 기업 투자자들과 미팅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같았다. 이 때만 해도 별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줄 알았다. 재무적으로 굉장히 건실한 기업이라고 소문난 회사였는데 자금의 어려움이라니... 정말 말이 안된다 생각했다.


2주차 : 2차 통보_제한된 정보 공유

회사 내 2가지 사업중 내가 속한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사업을 접는다고 하였다. 그 외엔 다른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는건지 언제 내 부서가 날아갈지 모르니 불안해 해야하는건지 투자는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건지... 나조차 제한된 정보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이 무거운 주제를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회사에 남을것인지 의사를 물어야했다. 그 무거운 짐이 오롯이 30대의 젊은 팀장들에게 부여되었다. 10명이 넘는 팀원들과 1:1로 면담했다. 팀원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투자는 제대로 되어 가는게 맞는건지, 우리 사업은 정말 안전한 것인지?

나는 한낱 월급쟁이이고, 따지고 보면 부장, 이사 임원진들도 다 월급쟁이 아닌가...

그냥 위에서 전달해준 '기다리라'는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누구는 남는다고 누구는 떠난다고 결정했다. 누구는 묵묵히 일을 했으며, 누구는 허위소문을 만들어내고, 누구는 그걸 입에서 입으로 옮겼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제한된 정보가 잘못이었던거다.


3~4주차 : 3차 통보_투자 성공이냐 아니냐

기업인수 전문가들이 회사를 찾았다. 그 투자자들이 나서서 우리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브리핑도 했다. 우리 본부의 전직원들이 그 투자자들의 이름과 회사를 명확히 기억할 것이다. 절대 망할 일이 없다고 자기만 믿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투자 계획은 장황하게 전직원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가지더니만, 투자가 불발되면서는 아무런 공식적인 이야기가 없었다. 임원진을 통해 이제 가망성이 없으니 마음을 정리하고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 정말로 길바닥에 나앉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에 남겠다고 의사를 밝힌 팀원들 한 명 한 명에게 다시 이 소식을 알려야만 했다.


5주차 : 광고주 정리

우리팀의 클라이언트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계약을 좋게 마무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대기업 광고주는 의외로 깔끔했다. 계약 불이행을 문제 삼지도 않았다. 문제는 중소기업이었다. 길길이 화를 내는 그들앞에 서서 연신 허리를 굽히며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잘못은 여왕개미가 하고, 사과는 일개미인 우리가 했다. 허리를 굽히는 것은 에이전시 마케터들의 숙명이다.


6~7주차 : 직원들의 연이은 퇴사

팀원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연차가 덜 쌓인 친구들은 이직을 빠르게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본부장이 우리 본부 직원들이 한꺼번에 이직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주었다. 아비규환 속에 입장이 엇갈린 직원들이 다시 한 뜻으로 뭉쳐서 일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나 역시 따로 인맥을 통해 소규모 인원들을 데리고 이직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는 바로 이직을 하고, 누군가는 면접을 보러 다니고, 누군가는 퇴사 후에도 출근하여 회사 서버에서 자료를 백업했다.


8주차 : 마지막 출근

소규모 인력을 데리고 이직할 곳을 정한 뒤, 마지막 출근을 했다. 그 곳에서 써내렸던 긴 긴 경력들이 이력서 단 한 줄로 정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원할 때 퇴사하고 싶다

회사를 나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품고 있다. 나 역시도 이 에이전시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거처만 정해지면 언제든 사직서를 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치도 못하게 회사가 먼저 나를 버렸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친정이 사라지게 되었다. 미련이 남아서인지 그 뒤로 옮긴 에이전시들은 나의 회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다니게 되었다. 에이전시 생활을 마감하고 브랜드로 이직한 지금도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퇴사하고 싶다. 다시는 회사가 망하는 그 악몽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미련이 생기지 않게... 원할 때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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