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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 서정시 May 21. 2018

사람으로 떠난다.

마케팅 에이전시 생활 회고록 #03

에이전시 한 곳에서 너무 오래 다닌 탓일까... 이직을 하려고 알아보던 차에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오랜 '을'의 생활을 하다보니 조금만 대화를 해봐도 어떤 성향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어느 정도 길러진 것 같은데,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도대체 가늠이 되질 않았다. 잡플래닛을 참고하기에는 '까기위해 깜'의 글들만 가득했기에 신뢰할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잡플래닛에 올라온 글은 글 갯수로만 판단하는 것이 나을것 같다. 살펴보면 실제 회사의 규모에 비례하여 글이 올라온다. 불만글이 많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불만글이 별로 없다는 것은 젊은 직원이 별로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경력직 면접, 겉으로 보는게 다는 아니다

콘텐츠 마케팅 규모 1위의 A에이전시

팀 단위 이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 곳의 이사가 연락이 왔다. 이 에이전시는 업게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한 곳이고, 최대의 규모(인력)를 자랑하고 있었다. 회사 대표는 꽤 젊었고, 젊은 나이에 수완이 좋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했으나, 그의 결정적인 실수로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업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인력구조에 대한 설명을 하며 이면지에 그래프를 그리는데... 이면지 앞면이 너무 잘 보였다. 김OO 이라 적힌 누군가의 이력서였다. 면접자 앞에서 이사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친다던지, 재무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니 말끝을 흐리는듯 자신없는 태도, 팀원들에게 한 번도 월급을 미뤄본적이 없다며, 덧붙임 말로 사옥을 사들이다보니 어쩔수 없었고 팀장들은 조금 늦게 지급했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모습. 단 1시간반동안 보여준 여러 모습들이 썩 좋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경영자가 아님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업계에서도 낮은 연봉과 잦은 직원 이탈로 소문이 나있었다.


합병에 합병을 거듭하고 있는 거대 디지털 계열사 B에이전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한... 특이한 형태의 기업 구조를 만들어가면서 꽤 주목할만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는 그룹이 있다. 그 그룹의 계열사로 콘텐츠마케팅에 과감한 투자를 시작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현재 연봉의 10% 상승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내가 꾸려놓은 소규모 팀에 대한 조건은 함께 일 것, 연봉상승, 일&육아의 병행 3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가 맞지 않아서 선택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1명이라도 받아줄 수 없는 곳은 갈 생각이 없었다. 팀 자체가 아닌, 개별 이직으로 간다면 더 좋은 곳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와서 들리는 소문에 그 그룹사에 많은 대행사들이 있는데, 신생인 그 에이전시에는 큰 투자를 해주지 않는 것으로 들었다. 밑에 C 회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쓰겠지만 신사업을 하는 곳에 힘들게 발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게임에 특화된 디지털 대행사 C에이전시

대표와의 1:1 면접. 시원하고 호탕한 하지만 일에 대해 꼼꼼하게 물어보는 성격으로 누가봐도 사업가 스타일이었다. 게임업계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약 50여명의 직원수와 사옥 이전한지 얼마 안되었다고 하는 좁은 사무실로 판단컨데 이제 막 발돋움을 하는 중인것 같았다. 콘텐츠 마케팅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 차에 전 회사의 부도 소식을 듣고 컨택을 해온 것이었다. 여기저기 C회사에 대해 알아보니 투머치한 목표로 영업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하고 사람을 잘 버린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은 어느 대행사나 다 가지고 있는 문제인듯하여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팀원들은 C로 선택을 하고 출근을 했으나,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A,B,C 에이전시명은 약자가 아닌 순서대로 붙인 기호



낯설음인가 적응의 실패인가

갖춰진 곳 or 갖춰지지 않은 곳

이전에 다녔던 회사는 꽤 오랜기간 업계에 살아남으며 잔뼈가 굵은 회사였다. 모든 업무가 전산화 되어 있었고, 내부에 모든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으며 적절한 곳에 적절한 인력이 앉아있었다. 비록 대기업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성이 다니기에 나쁘지 않은 회사였다. 그러나 C회사로 이직한 직후 제일 먼저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수기로 적는 결재라인이나 두서없는 인사팀의 설명, 전직원이 함께 쓰는 단 하나의 스테플러, 제본기 사는 가격보다 더 나가는 제본비용 같은 것이 아니라 듀얼모니터였다. 촌각을 다투는 마케팅업계는 모두 듀얼모니터를 쓰는줄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고보니 이전회사의 10년쯤전에는 모니터가 하나였던 것이 떠올랐다. 갖춰진 곳에서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은 그야말로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거였다. 제안서만 쓸 수 있으면 되지 라는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너무 안일하다 여겨졌다. 신사업이니만큼 공격적인 제안을 요구했었는데, 한 달에 두세개의 제안서를 써가는 과정중에 제안 이외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비유를 하자면, 모두가 총을 들고 나가는 전쟁에 우리는 활을 들고 나가는 격이었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십여년간 쌓아올린 자존심이 완벽히 하락하여 바닥을 쳤다. 익숙한 시스템에서 벗어난 환경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무너지는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었다. 제아무리 도전정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특히 에이전시에서는, 신사업에 쉽게 도전하지 않기를 권한다.


비판을 받는 곳 or 비난을 받는 곳

이 에이전시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던 것은 단순 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우리를 관리하던 본부장급이 인하우스 종대사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우리팀보다 반 년 먼저 회사에 왔으며, 디지털 마케팅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의 업무는 팀장급 관리만 있는것인지... 매일 나를 불러다가 2시간씩 설교를 했다. 그 설교의 내용이란 주로 이러했다.

나는 너네팀을 맡고 싶지 않았다

너는 K리그에서도 못 뛸 선수다 (마케팅업계를 월드컵에 비유하며 콘텐츠마케팅을 비하하는 의도)

이 회사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이 회사 제안서 수준이 그냥 찌껄이는 수준이다

내용은 주로 회사에 대한 탄식과 우리팀과 업무에 대한 멸시였다. 처음에는 단지 이 사람은 푸념을 자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설교를 매일 매일 4개월 이상 2시간씩 들었다고 생각을 해보라... 그 와중에 제안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시스템은 받쳐주지도 않고...

나는 정말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무얼 하는지 모르겠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이제 일이라는 것 조차 하기 싫어졌다. 퇴근길에는 내일 다시 출근할 생각에 눈앞에 캄캄했었다. 그런 암울한 정신으로 퇴근을 하며 내일 다시 출근할 생각에 이대로 영영 사라지고 싶었다. 늘 피곤하고 늘 힘들었고 늘 우울했다.


사람으로 떠난다.

반년을 버티고 퇴사하겠다고 대표에게 말을 했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만둬야겠다고 말을했는데 단번에 그 사람의 문제라고 알아들었다. 다른 상사를 붙여주겠다고도 하였으나 거절했다. 나는 일단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함께했던 팀원들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꺼냈는데 모두가 한마음으로 응원을 해주었다. 내가 퇴사를 결정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사람이 좋아 함께이길 원했던 우리는 결국 '사람'으로 인하여 뿔뿔히 헤어지게 되었다.

지나고보니, 그 회사가 영 갖춰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여러 대행사들에 비해 그 규모에 꽤 괜찮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가 그 회사에 있을 100가지 이유를 압도하였을 뿐이다. 많은 직업인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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