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에이전시 생활 회고록 #04
대한민국의 0.1%라는 대기업 직장인은 절대 하지 않을 걱정.
_업무의 체계 (System)
나머지 99.9%의 직장인들이 제일 힘들어하고, 이직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체계. 사직서를 내는 결정적인 순간은 대부분 사람을 이유로 내게 되지만, 그 기저에는 회사로 인해 누적된 불만-특히 체계-에 대한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정말 엉망이구나
이런 생각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 물론 당신이 대기업 직장인이라면 제외. 0.1% 당첨을 축하합니다.
내가 그동안 거쳐온, 혹은 겪어본 에이전시들은 그나마 크리에이티브를 요하는 마케팅 직종임에도 누가누가 엉망인가 밤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특히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 중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나의 마지막 대행사도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혹시 많은 직장인들이 회사에 불만은 생기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몰랐다면, 부디 이 글을 보고 다시 한 번 내가 처한 문제에 대해서 고심해보길 바란다.
상명하복의 고리타분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직급이 아예 없고 모든 이가 똑같은 일을 하는 회사에 다닌다면 필요없는 내용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직급이라는게 생겨나고 연봉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분명 연차가 차서가 아니다. 책임져야 하는 일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회사는 대학교 동호회가 아니다. 선임은 선임다워야 하고 후임은 후임다워야 한다.
배려를 가장한 #텃세
본부장 - 신임 팀장 - 셀장(과장) - 대리 - 사원
팀장이 적응할 기간을 주기 위해 당분간은 본부장이 신임 팀장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지 않는다. 본부장은 셀장(과장)에게 하던대로 광고주와 커뮤니케이션 하라고 하고, 기획안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고, 모든 일정과 피드백을 둘이서만 공유한다. 어느 과정에서도 팀장은 배제된다. 공유의 부재로 팀장은 1개월간 아무 내용도 숙지하지 못한다. 텃세인가 부적응인가 무기력해진 팀장의 역할에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
실제로 겪었던 일이고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다. 많은 경력직들이 또 다시 이직을 고민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텃세.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텃세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부적응하는 신임 인력을 탓한다. 텃세가 문제가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신임자의 직급에 따른 업무와 권한의 상실 때문이다. 팀장으로 뽑은 사람에게 팀장 역할을 주지않고 본부장과 과장이 팀장 역할을 나눠한다면, 어떤 경력자가 다시 발 붙일 수 있을까?
그 회사는 그런 방식으로 숱한 과장, 차/부장 경력직들을 다시 이직의 시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는 말한다.
"왜 이렇게 이력서가 안올라와?"
왜겠어... 이미 경력 시장에서 소문이 났으니까...
상사 눈치 보게 되는 #연차쓰기
"나는 일만 잘하면 상관없어~ 연차 쓰고 싶을 때 써~"
거의 대부분의 에이전시에서 이렇게 권고하는 상사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순진하게 듣고 연차를 내면, 통과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쓰기도 전에 눈치를 보는게 맞다고 해야하나...
연차의 눈치싸움은 내가 속한 그룹의 '장'들이 얼마나 허수아비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죽을듯한 야근과 살인적인 업무강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차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대부분의 에이전시 마케터들이 회사편을 들면서 '회사가 다 그렇지~' 하며 넘기곤 하는데, 본인이 사건이 터졌을 때 클라이언트의 모든 것, 주로 돈문제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주요 직급이 아니라면 연차에서 자유로워야하는게 맞다. 회사별로 직급의 차이는 있으나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자면 '임원회의'에 미참석하는 모든 직급이다. 연차의 눈치싸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상사들의 상사답지 못함에서 기인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대리/과장인데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간다고들 말한다. 왜 일이 안돌아갈까?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구조의 마케팅 회사라면 실무가 기본이된 사람만 '장'을 달 수 있다. 팀장 혹은 본부장이 그네들이 수 년 전에 겪었을 대리/과장의 실무를 하루 이틀도 못쳐낸다니 말이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가? 상사가 상사다워야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바로 팀원이 부재중 일 때 이다.
" I belong to the front. You belong to the tail. Keep your place. "
영화 설국열차에서 틸타 스윈튼의 대사.
계급사회의 기득권 입장의 대사이지만, 회사라는 조직에서 꼭 필요한 말이다.
디자인은 디자인팀이 계약은 경영지원팀이
유능한 마케터 A는 수치에 밝아 매출과 지출, 계약에 관련된 일에 익숙하며, 디자인에도 능한 인재다. 사내에 디자인팀이 있음에도 팀 내의 디자인은 도맡아하고, 급할 때는 팀의 계약 관련 일도 처리한다. 마케팅 업무에도 한치의 실수도 없는 사람으로 팀 내에 꼭 필요한 인재다.
대부분의 에이전시가 이런 형국이다. 물론 A는 인재다. 그런 인재가 조직 내에 있다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라. 굉장히 많은 유능한 마케터들이 저런 멀티형 인재로 거듭나면서 이직시장에서도 hot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다. 자기 일도 잘하는 '유능한' 마케터여야 hot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반적인 마케터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긴박하다는 이유로 혹은 커뮤니케이션이 잘안된다며 내/외부의 지원부서들과 협업을 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아무리 긴박해도 마케터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1시간이 나중에는 1년이 된다. 규모가 작은 회사에 있었던 사람들의 경력을 절반으로 깎는 결정적인 이유중 하나이다. 이것저것 하느라 마케팅 능력에 깊이가 없어진다. 이를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회사가 문제다. 마케터를 뽑았으면 마케터에게 맞는 업무를 주고, 디자이너를 뽑았으면 디자이너에게 맞는 업무를 줘야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조직의 의미는 사라지고, 조직 내의 구성원들이 이탈하게 된다. 조직간의 커뮤니케이션과 협업 절차가 문제라면 회사가 나서서 중재해줘야 하는 것이다. 일개 직원이 해결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