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생활이다.
시청에 들어와보니 기록은 생활이다.
1년간의 업무를 잘 정리요약해 놓은 것이 있는데 바로 ‘백서’이다. 내가 있던 부서에서도 매년 ‘백서’를 발간했다. ‘백서’ 작업은 막내 주무관이 주로 담당한다. 남들이 해놓은 업무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간단하다고 생각하거나 쉬운 업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긴 한데, 연차가 오래되지 않은 주무관의 경우에는 그 부서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시청에 재직할 당시 매년 백서를 발간했는데, 많은 기관들에서 요청이 와서 보내주곤 했다. 백서는 만든 사람만 본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연초에 시청 로고가 찍힌 수첩이 제공된다.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일텐데 시청에서도 어딜가던지 수첩은 내 단짝이다. 1년 365일 윗 분의 말씀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받아적으면 받아쓰기의 달인이 된다. 한번은 “국장님이 그 때 뭐라고 하셨어요? “ 하고 물었더니, “몇 월 몇 일 무슨 안건이었는데요. “ 하면서 담당 주임이 보여주는데 국장의 뉘앙스까지 적어놓았더라. 농담도 적어놓았더라.. 무서울 정도로 기록한다. 가끔 나는 회의 때에 누군가의 발언을 들으면서 반대발언을 적는다. 내게 발언권이 없을 때 … 그렇게 적기라도 하면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된다.
기록은 습관이다.
한번은 감사과에서 청탁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주임의 컴퓨터를 들고 갔다. 그 주임은 누구에게 뭘 받았는데 언제 받았는지 엑셀에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한다. 보통 받은 쪽은 잘 안적고 제공한 쪽에서 기록을 하지 않나. 다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한 주임이 아마도 습관이었을거에요.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수긍했다. 그래도 그렇지 받은 것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다니 정말 대단하다.
예전에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 교수님은 엑셀로 가계부를 작성했다. 늘 1원 하나까지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나도 지금은 엑셀로 가계부를 작성한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다. 몇 년동안 교수님의 습관을 지켜보았기에 나도 자연스레 습관이 옮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엑셀로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통화할 때 미리 이야기할 포인트를 적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통화할 때 정말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하고 끊는 경우는 없다. 특히 뭔가 물어보려고 전화했다가 소소한 일상 수다로 끝나는 경우가 없게 된다. 글을 작성할 때에는 말 하는 것처럼 일단 쓰고 그 다음에 주석도 찾아서 달고 문장을 다듬는 것도 교수님께 배운 것이다. 논문을 쓸 때 참 용이했다. 요즘은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고 나서 카피** 사이트에서 표절률을 돌려보는데 그 때 어느 보고서나 논문에 있는 문장인지 다 뜨기 때문에 그것을 참고로 주석을 다는 경우도 많아졌다. 옛날에는 일일이 모든 논문과 책을 찾아야 했는데… 참 편한 세상이다.
기록은 나침반이다.
자기 전에 그 날 하루의 일과를 써 본다. 기분 나빴던 일을 기록한다. 기분 좋았던 일을 기록한다. 특히 생각나는 일을 적는다. 시간대별로 무슨 일을 했는지 적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 할 일 목록에서 가장 빨리 해야할 일(시급), 중요한 일을 체크한다. 무엇을 가장 먼저 할지 우선순위를 적는다. 하나씩 이행하면서 완료한 일에는 표시해 둔다.
특강할 일이 있으면, 강의내용을 먼저 적고나서 그 다음에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할 때도 있고 프리젠테이션을 만들어 놓고 강의내용을 적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인사말부터 마무리말까지 모두 적고 그대로 읽어본다. 어떤 때는 녹음을 해서 차 안에서 듣기도 한다. 내가 내 강의를 여러번 듣는 셈이다. 이렇게 하면 강의가 옆으로 샐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된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할 말을 미리 적어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안녕하세요? 000 입니다. 방금 제 소개를 해주셨는데요.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 계신 선생님들과 함께 나눌 주제는 …’
기록은 통계이다.
새로운 일이라면 일의 시작과 끝 시간을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그 일을 수행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애니메이션 스크립트 번역을 잠깐 도운 적이 있다. 1개 시트를 번역하는데 5분이 걸린다고 하면 시트가 100개라면 500분, 이것을 시간으로 나누면 대략 8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얼만큼의 일을 받을 수 있을지 계산이 가능하다. 단순한 일은 계산 가능하지만,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일은 시간 계산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는 회의를 하게 되니 회의시간을 산정해본다. 안건 하나 당 논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총 회의시간을 먼저 정해놓고 그 안에서 발언자 수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회의는 1시간이면 훌륭하다. 그러나 1시간에 끝나는 회의는 드물다. 2시간 회의면 적당하다. 발언자나 토론자나 충분한 회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2시간이 넘어가면 참석자 모두 지친다. 회의 녹취록을 만들어야 한다면 매우 힘들다. 나는 회의를 하고나면 상황을 기억해서 발언들을 적고 그에 대한 생각을 옆에 적어놓는다. 출장을 나간 것이라면, 오는 교통편 안에서 스마트폰에 기록한다. 그러나… 요즘은 네** 클로바 노트를 활용하면 되는데 600분까지 가능하다. 영어 번역도 된다던데 한글만 사용해서 잘 모르겠다. 녹취율이 내가 경험하기에는 85% 이상이다.
만약 출장이 있으면, 오고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교통수단을 적는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적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번에 동일 지역으로 동일 사안으로 출장가는 경우 오고가는 시간이 계산할 수 있으니 그 다음 회의가 있다면 언제쯤 가능한지 가늠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오고가는 시간+현장에서 소요되는 업무시간=총 출장시간 이다. 사실 이건 그다지 필요는 없다. 적지 않아도 가늠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적는다.
기록은 치유이다.
무엇이든 적는다. 아무거나 적는다. 길 가다가… 전철 안에서… 버스 기다리다가…적는다. 특히 화가 날 때, 짜증날 때, 우울할 때, 누군가 욕하고 싶을 때…적는다.
한참 후에 내가 적어 놓은 글들을 읽으면서 내 감정에 대해 잘 알게 되고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반성도 한다. 당장에는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아닌 것들이 참 많다.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음가는대로 적는다. 적어나가면서 화가 풀릴 때도 있다. 잊어지지 않는 것일 수록 자꾸 적는다. 잊기 힘든 기억일 수록 더욱 적는다. 이런 감정 저런 감정 모두 적는다. 몇 년이 흘러 다시 읽어보면 유치할 때도 많다. 그 때의 나의 감정이 그랬구나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참 대견하다 그런 생각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