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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변호사 Apr 09. 2023

전문성과 탁월성

삶의 온전함을 찾아가는 여정

8부활절(Easter day)은 싱가폴의 공휴일이다. 이번 Easter day는 금요일이라 Long weekend를 맞이한 많은 이들이 주말여행을 떠났다. 싱가폴은 코로나로부터 가장 빨리 일상을 회복한 나라 중에 하나이고, 국경들도 다 열리면서 코로나 이전의 주변 동남아 국가로의 여행이 자유로운 싱가폴의 일상이 회복되고 있다.


연휴를 맞이하여, 온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아이는 헬퍼와 싱가폴에 두고 남편과 페리를 타고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인도네시아 섬, 빈탄의 리조트로 짧은 여행을 왔다. 싱가폴로펌인 TSMP Law corporation에서 코리아데스크(Korea desk)를 오픈하고 정신없이 달리며 육아와 신규시장 개척을 병행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한국 출장도 2차례나 다녀왔고, 강의하고, 사건 처리하며, 심지어 둘째 아이까지 임신해서 여름이 오기 전 출산 예정이니, 나름 최선을 다한 한 해였으리라.


지난 일년은 정신없이 흘렀지만, 초심자의 마음으로 열정을 다했고 좋은 인연들을 만나고 소개받고, 사건들을 늘려가는 과정에서 좌충우돌도 하면서 경험을 쌓아하고 있는 중이다.


싱가폴에서 1시간 거리의 Bintan 섬 (인도네시아)


오래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니, 지난 1년 간 외국로펌에서 한국변호사로서 살아남기 및/또는 성장하기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워킹맘으로서의 일상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 번 정도 정리해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번 휴가는 유일하게 내게 그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는 몇 일이기에 이 글도 쓸 수 있는 것 같다.


재작년 쯤 임팩트 투자로 유명한 제현주 대표의 <일하는 마음 - 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이라는 에세이집을 샀는데, 조금씩 읽다가 완독을 하지는 못했다. 이번 휴가에도 책 몇 권을 가지고 왔는데(사실 휴가를 가면서 일하는 마음에 관한 에세이를 들고오는 마음은 무엇일까 싶지만^^;), 위 책을 읽다가 명확한 언어없이 희미한 안개처럼 내 속에 들었던 의문점에 대해 이름을 붙여주고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구절들을 발견했다.



바로 "전문성"과 "탁월성"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외국로펌, 그것도 싱가폴에서 코리아데스크를 열게 되면서 나의 고민은 이러했다.


대형로펌의 공정거래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나는, 공정거래 분야만 10여년 이상 하면서 외국계 글로벌기업, 국내 대기업의 대형사건들, 공정거래위원회가 관할하는 많은 법들(공정거래법, 하도급법, 가맹사업법, 소비자보호법 등등)을 처리하고, 조사대응부터 처분취소소송, 사전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 자문 및 교육에 이르기까지 공정거래 분야에 관해서는 탁월한 전문성을 가진 변호사로서 성장해왔었다. EU 경쟁당국이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LLM과정도 마치고, 미국계 글로벌 로펌에서 세컨먼트도 하면서 공정거래 분야에 관해서는 부족함이 없는 커리어를 다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형로펌들은 보통 수백에서 많게는 천명 이상(김앤장)의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조직에서는 어떤 특정분야의 샤프한 전문성을 보유하는 것이 생존 조건이자 미덕이다. 무엇보다 한국로펌에서 한국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니, 실체적인 법에 대해서 조언하는 메인 역할을 해온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변호사언니들> 구독자라면 아시다시피, 남편과의 오랜기간 롱디 생활 끝에 싱가폴에서 정착을 결정하고, 운명적으로 싱가폴 메이저로펌에서 코리아데스크를 오픈하면서,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 설레임도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속해있던 전형적인 틀과 나의 역할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던 조직 속에서의 나를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가는 나를 스스로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나의 역할을 알면서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또한, 한국로펌에서는 외국변호사(예를들면 미국, 영국변호사)들이 한국변호사 집단을 서포트 하는 구조라면, 여기서는 내가 외국변호사이니 싱가폴 변호사들을 서포트하는 구조가 된다. 그 과정에서의 괴리감도 분명 존재했다.


그 마음에는 10년 이상 동안 프랙티스를 한 공정거래라는 전문성을 더이상 살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로 인해 나는 지금 과연 "전문가(?)인가" 하는 고민과 나의 커리어가 변호사라는 점에서 연결되면서도 동시에 단절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모두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 아래 글귀가 눈에 와 닿았다.


전문성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인정이라면, 탁월함은 자발적인 동기부여를 통해 스스로 쌓아가는 역량이다 (<일하는 마음>, 166면)
요즘 나는 이런 이야기 속 '전문성'이 있는 자리에 '디딤돌'이라는 단어를 바꾸어 넣어 읽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전문성이라기 보다는 어디를 가든 커리어를 지탱해줄, 혹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디딤돌 같은 것이다  (<일하는 마음>,  167면)


대형로펌 파트너였다는 전문성, 공정거래 한 분야에서의 전문성이 나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 개념에 따르면, 기존의 전형적인 틀에서 "전문성"이라고 불렸던 그 타이틀은 사실 내가 싱가폴로펌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게 해주는 "디딤돌"이 되었다. 지난 십 수년간의 변호사로서 꽉 채워왔던 시간이 있었기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것 같은, 외국로펌에서의 코리아데스크 운영이라는 자리를 어려움 없이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단절되었다고 느낀 그 시간들은 사라지는 경험들이 아닌, 그 디딤돌로서의 역할은 이미 충분히 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제현주 대표는, 일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의 탁월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있다.


그렇다면,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탁월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럼에도 더욱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탁월성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자격조건 같은 것은 없지만, 시스템 내부에 안착해 그저 시간을 쌓는 것으로 탁월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자기만의 만족기준,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 탁월성을 만들어 낸다.

탁월성은 또한 자신이 해온 일,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반추하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의 경험을 통해 써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일하는 마음>, 168-169)


"탁월성"은 자신이 해온 일,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반추하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가의 문제라는 글귀가 마음에 와 닿았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니, 나는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있었다. 사실 코리아데스크라는 것을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성장시켜 나갈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싱가폴 리걸마켓을 분석하고(싱가폴에는 글로벌 인터내셔널 로펌, 싱가폴 로컬로펌, 한국로펌의 싱가폴지사 등이 있고, 고객과 사건에 따라 수요가 다르다), 타켓 대상 고객들의 리스트와 인더스트리를 파악하고, 싱가폴 지사/법인과 본사와의 관계에서 리걸 수요를 어디서 담당할지 분석하고, 현지와 본사 중 어디를 타켓할지 등도 고려한다. 국제중재, 싱가폴 회사법, 건설, 노동, 금융규제와 Real estate PF, 형사에 이르기까지 매번 수요와 니즈도 다양한 고객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지,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할지 고민한다.


다양한 행사를 함께 호스팅하고, KOTRA싱가폴 오피스와 한국기업들을 대상으로 강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돌이켜보면, 한국로펌에서의 알찬 시간들은 모두 다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싱가폴 법에 관한 자문이더라도, 리걸마인드라는 것과 고객의 법률이슈를 파악해서 본질에 부합하는 솔루션을 준다는 프랙티스 경험은 결국 동일했다. 공정거래를 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인더스트리 경험은, 어느 분야의 회사들을 만나도 할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컴플라이언스 경험들은 회사 조직의 생태에 대한 이해를, 한국에서의 강의와 교육경험들은 주제가 싱가폴법으로 바뀌어도 어떻게 해야 청중들이 관심을 가지는지, 니즈가 어디에 있을지 파악하는데에는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탁월함"의 영역을 모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덕분에 전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나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해소되었다.


한국기업들을 대상으로 싱가폴에서 기업운영 시 유의할 법률이슈 강의




삶의 전체가 온전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


휴가가서도 일하는 마음을 생각하듯이, 우리가 직장을 그만두거나 일을 아예 하지 않지 않는 이상 인생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절대적이다. 일이 우리의 시간과 마음과 생각을 잡아먹는 비중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일을 잘하는 것과 탁월하게 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나"라는 자아가 행복하고, 그 과정에서 나라는 자아가 성장하고 충만하지 않는다면 곤욕스러운 시간들을 버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현주 대표는, 나아가 일에서의 휼륭함과 삶의 온전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일에서 훌륭하더라도 삶이 온전하지 않다면 좋은 인생이라 할 수 없듯이, 제 대표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시모어 번스타인의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이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열다섯 살 때 내가 연습을 잘해서 뭔가를 성취하고 나면 피아노에서 물러날 때 나 자신에 대해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삶의 다른 이들이 내가 연습하면서 겪는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그랬어요.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언짷고 죄책감이 들고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죠. 그래서 피아노 연습과 삶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내가 하는 음악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들은(너무도 많은 음악가들은) 이런 통합을 음악적으로 이루고는 피아노에 두고 그냥 가버려요.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인간적으로 망가지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죠. 그들은 음악적으로 이룬 통합을 일상의 삶으로 가져가는데 실패합니다. 삶과 조화시킬 수 있는 통합을 말이죠"

시모어에게 음악은 일에서의 훌륭함과 삶의 온전함 사이의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고, 그런 일을 그런 방식으로 하면서 살고 있었다(<일하는 마음>, 184-186면 발췌)


내가 시간과 애정을 쏟아붓는 "일"에서의 훌륭함이 나의 일상의 삶의 온전함과 하나가 될 때, 삶이 충만해지는 것이구나.  이것이 내가 추구하던 방향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싱가폴에서의 삶은, 일하지 않는 - 가족과 친구들과의 일상이 충분히 보장되고 평화로운 편이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워보지 않아 어떤 삶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한국에서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아이에게 할애할 수 있는 것 같다. 싱가폴 외국로펌에서, 한국변호사(내가 이들에겐 외국변호사인)로서 내 역할과 시장을 만들어나가는 일에 쏟는 열정과 애정만큼, 내 일상에도 충실할 수 있는 삶,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하는 나로서의 자아와 온전한 나의 자아, 관계맺고 있는 자아(아내, 엄마, 친구 등)가 모두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삶


그 온전함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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