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최악의 전쟁은 비교적사소해 보이는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베이핑에서 15km 떨어진 작은 마을인 완핑 인근에서 중국군을 겨냥해 총격을 가했다. 앞서 일본군 지휘관은 병사 1명이 실종돼 완핑에 진입해 수색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중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쑹저위안이 수색을 거부하자 '루거우차오'라는 다리를 사이에 놓고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틀간 벌어진 전투는 장제스에게 곧바로 보고됐다. 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일기에 "왜구가 루거우차오를 공격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군대를 보내 일본의 야욕을 꺾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더욱이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이핑은 역사적 상징성이 큰 만큼, 가급적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노에는 "가장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밝혔고,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동원령을 선포했다. 일본군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중국군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목표로 하는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7월 26일,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가했다. 표적은 베이핑과 톈진이었다. 폭격기 등을 동원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에 이 도시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이외에 중국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중국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당시 장제스는 당초 결의와 달리 정예병력을 신속히 북부 지역에 투입하지 않았다. 해당 군벌들에게 방어를 맡기다시피 했다. 장제스는 다가오는 더 큰 전투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난징으로 돌아와 군사위원회 회의 및 비밀 합동국방회의 등을 열어 전쟁과 관련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도 참가해 항일통일전선이 실현됐음을 보여줬다.
장제스는 이 전쟁이 "중국 민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중국이 크게 부흥할 것이지만, 패배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싸울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것인가"라며 결단을 촉구했다. 일본의 침략 행위와 장제스의 열정적인 연설 등으로 인해 분위기는 전쟁 지지로 쏠렸다.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기립하라는 구체적 의사표시 요구도 있었다. 원래 장제스의 노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당초 일본과의 협상을 선호했던 왕징웨이 등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어섰다. 이로써 중국 정부의 방향성은 보다 명확해졌고 본격적으로 '중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중국과 일본은 1937년 9월 중부 지역에 있는 대표적 도시인 '상하이'에서 맞붙게 될 예정이었다. 상하이는 중국 근대화와 관련한 모든 것이 응집된 장소였다. 장제스는 북부 지역과 달리 상하이를 전략상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정예부대인 제87사단, 제88사단을 전투에 투입했다. 주요 군벌들도 군대를 보내 지원했다. (장제스는 해외에 널리 알려진 상하이에서의 전투를 통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본도 육군과 더불어 해군 부대를 대거 상하이로 이동시켰다. 풍족하고 평온한 도시였던 상하이는 전투가 임박하자 공황 상태에 빠졌다. 지역을 탈출하려는 피란민들이 대폭 증가했다. 지역 시설들도 이전을 시도했다. 이런 가운데 국민당군 지휘부는 상하이에 있는 일본 전함인 '이즈모'를 폭격하기로 했다. 이즈모는 일본 해군의 주요 자산이었다. 하지만 중국 폭격기들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목표물에 타격을 가하기는커녕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지에 폭탄을 투하했다.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별안간 폭사하고 말았다. '검은 토요일'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빌미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다. 대규모 폭격과 함께 치열한 시가전이 펼쳐졌다. 상하이 곳곳이 속절없이 파괴됐다. 일본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중국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과 군사적 거점들을 정밀 타격해 성과를 올렸다. 외국인들이 머물렀던 국제 공공 조계지역도 공격했고 민간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10월 말에 이르자 중국군은 쑤저우허로 밀렸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병력을 증원해 추가적인 공격을 가했다. 11월이 되자 중국군은 더 이상 상하이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철수를 결정했다. 상하이가 함락됨에 따라 난징 방어도 곤란해졌다. 중국군 총사령부는 '우한'으로 이동해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만 했다. 국민당이 상하이 전투에투입한 병력은 총 50만 명에 달했고, 약 19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공산당군은 여기에 참전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북부 지역에 위치한 산시성의 주요 도시인 타이위안과 다퉁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이 도시들은 군수공장과 지하자원이 많은 곳이었다. 주요 군벌인 옌시산이 타이위안에서 상당히 선방했지만 일본군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1937년 말, 중국 북부 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군이 차지했다. 상하이를 포함해 일본군의손아귀에 넘어간 도시들에 살았던 중국인들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이들은 일본군의 잔학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피란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선착장 등 대규모 탈출이 시행될 곳들과 우한 등 국민당 정부가 옮겨갈 곳들은 넘쳐나는 피란민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때로는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몸을 피하는 사람들도 목격됐다. 전쟁 기간 내내 최대 1억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피란길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난징 대학살
당초 일본군은 상하이 전투 등에서 손쉽게 중국군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자신들의 전력을 과신한 반면 중국군의 전력은 얕잡아 봤다. 그런데 승리를 하긴 했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 능력에 놀라면서도 독기를 품었다. 열등한 것들이 감히 천황의 군대에 생채기를 낸 데 대한 복수를 하기로 다짐했다. 그 처참한 현장이 될 곳이 바로 '난징'이었다. 국민당 정부와 중국군이 난징을 포기했을 때, 이곳에선 대규모 혼란이 발생했다. 일부 중국군 병사들이 건물에 불을 질렀고 상거래가 무너졌으며 주요 피신처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몰려와 빽빽해졌다. 무엇보다 위생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난징 곳곳에 온갖 배설물들이 가득했다.
12월 13일, 마침내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상술했듯 일본군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거리에 있는 무고한 중국인들에게 다가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총검을 휘둘렀다. 총탄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머리와 몸을 박살 냈고 날카로운 칼은 그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일부 중국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지만 이내 붙잡혀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눈과 귀가 사라지고 코는 일부만 남았다. 참수를 당해 떨어진 머리가 도처에 굴러다니기도 했다. 난징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일본군의 학살 방식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병사들이 총보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데 능숙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봉건 시대의 무사인 '사무라이'라고 생각하며 시도 때도 없이 난도질을 했다. 심지어 일부 병사들은 '목베기 대회'를 하기도 했다. 누가 먼저 중국인 100명의 목을 베는지를 두고 경쟁했다. 여기서 우승한 병사는 중국인들의 잘린 머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암매장만 된것이 아니었다. 산 채로 '생매장'도 당했다. 일본군은 넓은 구덩이를 판 후, 손이 뒤로 묶인 중국인들을 대거 밀어 넣었다. 중국인들은 저마다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구덩이가 중국인들로 빼곡해지자 일본군은 그 위를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매우 단단하게 무덤을 만들었다. 생매장된 곳에선 중국인들의 끔찍한 절규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잠잠해졌다. 당시 난징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시체들을 밟지 않고는 좀처럼 거리를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이때 소멸된 중국인들은 약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그저 패잔병들을 소탕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무자비한 행위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명백한 '공포'를 심어주고, 항전 의지를 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살에 더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간'도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다. 매일, 매시간마다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루에만 1000여 명의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2세 소녀에서부터 60세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강간은 전방위로 이뤄졌다. 수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했다. 가끔씩 처절한 저항도 있었다. 일부 여성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맞서 싸웠고, 더러운 배설물을 자신의 온몸에 발라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맞서 싸운 여성들은 결말이 좋지 못했다.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해당 여성들의 목을 내리쳤다. 1938년 1월 중순이 될 때까지 약 6주 동안, 일본군은 난징을 비롯한 중국 중부 지역에서 학살과 강간,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 사회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도록 보안에 각별히 신경 쓰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안전위원회 등의 노력으로 일본군의 만행은 서서히 알려졌다. 2월 중순에 접어들어서야 일본군의 광기는완전히사그라졌다. 이제는 공포 유발보단 주민들의 협력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중국군과의 또 다른 대규모 전투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잠깐의 승리
이 즈음 일본 도쿄에선 일왕이 참석한 어전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최후통첩이 나왔다. 72시간 내로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중국 북부 지역을 영원히 넘길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중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은 "앞으로 국민당 정부와 어떠한 타협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만간 중국 중동부에 위치한 '쉬저우'가 최대 관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이곳은 중부의 인구밀집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중국으로선 방어가 일본으로선 점령이 반드시 필요했다. 더욱이 장제스는 쉬저우가 함락되면 중국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인 우한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라 전망했기에 중국군에게 사활을 걸라고 명했다. 4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진푸 철도를 따라 북쪽과 남쪽 두 방향에서 진격했다.
이때 핵심적인 전투는 오래된 성벽 도시인 쉬저우의 '타이얼좡'에서 벌어졌다. 장제스는 직접 쉬저우로 와서 "타이얼좡에서 일본군을 반드시 격멸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일본군은 무기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중국군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이 전투에서만큼은 그러한 이점을 누리지 못했다. 타이얼좡 특유의 환경상, 원시적인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와 골목 등 곳곳에서 양국군의 치열한 육탄전이 발생했다. 일주일 넘게 팽팽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중국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병력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재보급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4월 7일, 마침내 힘이 빠진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이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다. 쉬저우는 물론 여타 중국 정부 관할 지역에서 기쁨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국제 사회도 타이얼좡 전투를 의미 있는 승리로 규정하며 중국의 항전 의지에 크게 주목했다. (다만 국제 사회는 여전히 중국을 무력으로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은 계속 단독으로 싸워야 했다.)
환호성이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타이얼좡 패배를 계기로 심기일전했고, 다시금 대규모 군대를 빠르게 진격시켜 쉬저우를 포위했다. 중국군은 용감하게 항전했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폭격 등에 무너졌다. 쉬저우의 수많은 건물과 다리 등도 철저히 파괴됐다. 도시는 황폐해졌고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장제스와 국민당군 지휘부는 쉬저우를 포기하고 철수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가다간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에 자신들도 궤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사적으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우한으로 이동했다. 비록 안전한 철수는 했지만, 전략상 중요한 지역인 쉬저우를 내줌으로써 장제스는 한층 급박해졌다. 일본군이 머지않아 우한으로까지 밀려들 태세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