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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Sep 07. 2024

'러일 전쟁'-몰아치는 일본군, 뤼순 포위·랴오양 회전

[2] 대제국 격침된 전쟁사 최대 이변

러시아군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있는 일본군의 모습.

■뤼순 포위

1904년 2월 8일, 일본 육군이 제물포에 상륙해 그곳에 정박 중인 러시아 전함이 뤼순항으로 출항하지 못하게 막았다. 순양함과 구축함 등으로 구성된 일본 해군도 나타나 압박을 가했다. 이에 러시아의 바랴크호와 코레예츠호 등이 돌파를 시도했지만, 맹렬한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러일 전쟁'의 서막이었다. 비슷한 시점에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해군이 뤼순항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러시아 해군은 대응에 나섰다. 약 8500 미터 거리에서 양국 해군 간에 치열한 함포 사격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약 50분 가까이 지속됐다. 일본군은 뤼순 요새의 포문이 열리자 일단 후퇴했다. 전쟁 초반에 뤼순항에 있던 태평양 함대를 기습 궤멸시키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 해군은 작전을 바꿔서, 향후 일본 육군의 진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러시아 함대를 뤼순항에 '봉쇄'하기로 했다. 좁은 뤼순항 입구에 폐색선을 침몰시킴으로써 봉쇄를 도모하려 했으나 러시아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때 새로 부임한 러시아 사령관인 마카로프는 연안 포대의 엄호를 받으며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진격해 들어오는 일본 장갑함들을 목격한 뒤, 별안간 뤼순항으로의 회항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불행한 일을 맞이했다. 마카로프 등이 탑승한 러시아군의 기함이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의해 폭파되면서 침몰했다. 마카로프와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사령관과 기함을 잃은 러시아군은 허겁지겁 뤼순항으로 귀항해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뤼순항 봉쇄가 이뤄지면서 일본군은 전쟁 초기 제해권을 어느 정도 장악했다.


일본군의 전개는 계속됐다. '구로키'가 이끄는 일본 육군(제1군)이 조선에서 집결을 완료한 압록강향해 진격했다. 이 부대는 압록강을 도하해 펑황청 방면으로 진격한 뒤, '오쿠'가 이끄는 일본군(제2군)이 랴오둥 반도의 피쯔워에 상륙하는 것을 보호할 계획이었다. 러시아는 군대를 압록강 하구 쪽에 전진 배치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이 압록강에서 시위 행위만 할 것이라는 안이한 예상을 했다. 방어 태세도 허술했다. 참호를 경시해 제대로 된 진지를 구축하지 않았고, 포병들은 산악 경사면에서 노출된 상태로 있었다. 부대 간 의사소통 수단인 전신선도 절단됐다. 일본군은 첩보 활동을 통해 러시아군의 상태를 파악했다. 4월 26일, 일본군 주력은 압록강 하구 쪽을 지키고 있던 러시아 의용기병대를 물리친 뒤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압록강 인근의 섬에 포병을 배치해 보병의 도하를 엄호했다. 아울러 또 다른 일본군(우익 제12사단)압록강과 연결된 아이허를 도하해 주롄청~사허쯔 선에 있는 러시아군 주 진지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해 들어갔다. 일본군은 보병과 포병의 합동 작전을 적절히 전개했고, 개방된 공간에 노출돼 있던 러시아 포병들을 손쉽게 격파했다. 러시아군은 중요한 시점에 반격을 가하지 않았고 극도의 혼란 속에서 퇴각했다. 일본군은 압록강 전투에서 특별한 손실 없이 승리한 반면 러시아군은 30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구로키가 이끄는 부대의 성공적인 전개로 일본군의 랴오둥 반도 상륙이 확실히 보장됐다.


얼마 뒤, 일본군을 태운 26척의 수송선 편대가 랴오둥 반도의 피쯔워에 상륙했다. 오쿠가 이끄는 약 4만 명의 일본군도 랴오둥 반도에 추가 상륙해 뤼순과의 연결로를 차단한 뒤 진저우 지협을 향해 진격했다. 진저우는 뤼순으로 향하는 주요 관문이었다. 당초 일본군이 랴오둥 반도에 상륙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던 러시아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러시아군 지휘부는 공격하지 말고 요새와 협력해 방어하라고 명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병력 증원을 통해 완전체가 되기 전까지 방어에 집중한다는 계획이었다. 때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전력과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첩보 활동이 매우 부실했기 때문이다. 정밀한 대응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수송 여건 등으로 일본군의 상륙이 지체된 사이 러시아군은 유럽에서 온 병력으로 전력을 다소 보강했다.) 5월 26일, 일본군은 진저우 진지를 향해 맹렬하게 돌격했다. 일본 함대도 진지를 향해 함포 사격을 가했다. 초반에는 일본군의 공격이 여의치 않았고 막대한 병력 손실만입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돌격과 포격을 행한 결과, 진지 전선을 가까스로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군은 적지 않은 전쟁 물자를 방치한 채 뤼순 방면으로 퇴각했다. 진저우를 점령한 일본군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뒤이어 일본군은 다롄 가까이에 있는 난산을 공격했다. 전투는 이틀 만에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혈전이었다. 러시아군의 기관총이 위력을 발휘해 일본군은 4000명 넘게 전사했다. 30일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 다롄에 입성했다. 다롄과 인접한 뤼순은 완전히 고립됐다. 이후 오쿠의 일본군은 '랴오양'으로 북진했고, 뤼순 점령을 목표로 하는 '노기 마레스케'의 일본군(제3군)이 새로 편성됐다.


뤼순이 위기에 처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해졌다. 이들은 뤼순을 차르 체제의 핵심 보루라고 여겼다. 만약 여기를 잃는다면 러시아의 정치적, 군사적 위신이 크게 실추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러시아 정부는 현지 사정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즉시 3만 명이 넘는 병력을 출격시켜 뤼순을 지원하라고 명했다. 이에 시타켈베르크의 러시아군이 뤼순항 북부에 위치한 와팡거우로 진격했다. 군사학계에선 이러한 전개를 '모험'이라고 여겼다. 일본군의 전력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러시아군 주력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참호 구축에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 적군의 우회 포위 공격을 쉽게 허용할 수 있는 곳에 참호를 판 것이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일본군은 집요한 우회 기동과 포위 공격 등을 통해 러시아의 때늦은 뤼순 지원을 무산시켰다. 연이은 패배와 후퇴로 러시아군 내부에선 불길한 패배주의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 시기에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 편대의 맹활약은 러시아에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줬다.)


■랴오양 회전

뤼순과 더불어 랴오양이 러일 전쟁의 핵심 승부처였다. 일본군은 10만 명이 넘는 3개의 집단군(오쿠, 구로키, 가게아키)을 편성해 공격 태세를 갖췄다. 이에 대응하는 러시아군은 15만 명이 넘었고, 랴오양은 물론 이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요새형 진지를 구축했다. 표면적으론 러시아군이 우세해 보였지만, 방어와 후퇴 지향적인 태도로 화를 자초하게 될 터였다. 러시아군은 랴오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적극적 공세를 통해 적군의 진격을 차단하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쿠로파트킨'을 중심으로 한 지휘부는 길목에선 소극적 저항과 전략적 후퇴를 하고, 랴오양에 집결해 최종 승부를 본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식 작전을 일정 부분 도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7월 23일, 오쿠의 일본군이 길목 중 하나인 다스차오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양측 사이에 포격전이 전개됐다. 이전과 달리 러시아군 포병들은 엄폐된 지형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일본군이 적군의 우측으로 공격해 들어갔지만 백병전에 의해 격퇴됐다. 여기까진 러시아군이 좋았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밤 중에 퇴각했다. 랴오양에서의 결전을 대비하라는 지휘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일본군은 고전했지만 러시아군의 성급한 후퇴 덕분에 승리했고 잉커우까지 점령했다. 오쿠가 이끄는 일본군의 우측 후방에는 노즈의 일본군이 있었다. 이들은 시무전에 있는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진격했다. 이때 노즈의 절묘한 전술이 빛을 발했다. 일본군은 별안간 강력한 진지를 회피했고, 비교적 허술해 보이는 두 러시아군 부대 사이를 집중 공격했다. 타격을 받은 러시아군은 또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31일에는 구로키가 이끄는 일본군이 포병대대의 엄호 하에 위수린의 거점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뒤쪽으로 후퇴해 진지를 구축했고 돌격하는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굴곡진 지형을 활용한 엄폐술 등으로 적군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머지않아 위수린도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음으로 타완 거점에 대한 공세가 펼쳐졌다. 구로키는 제2사단 소속의 모든 여단을 집결시키는 등 전력을 총동원했다. 러시아군은 어느 정도 저항했지만 끝내 진지를 내주고 후퇴했다. 일련의 전투들에서도 러시아군의 명백한 허점이 드러났다. 일본군의 우측이 위험에 노출됐음에도 공격하지 않았고, 엄호용 포병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아 보병의 전개를 힘들게 만들었다. 이후 비를 동반한 무더위로 일본군의 공세는 잠시 주춤했다. 이때 일본군은 병력을 증원하고 군수물자 수송 등을 원활하게 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러시아군 역시 병력을 증원했다. 그러다가 8월 24일 구로키의 일본군이 안핑링 거점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재개됐다. 구로키는 러시아군을 기만하는 술책을 구사했다. 근위사단을 미리 보내 러시아군(제3시베리아군단)의 우측을 공격함으로써 주공격 방향이 여기라고 믿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안핑링 진지에 있는 러시아의 제10군단이 표적이었다. 기만책의 성공으로 주공격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강력한 포위 압박이 지속되자 제10군단은 무기들을 놔두고 후퇴했다. (이 즈음에 러시아군이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자라이스키연대가 일본 근위사단에게 반격을 가해 패퇴시키기도 했다.) 상술했듯, 러시아군 지휘부는 랴오양에서의 결전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이에 랴오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의 전투들은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러시아군 병사들은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울 때가 많았지만, 지휘부의 석연치 않은 방침이 모든 노력을 상쇄시켰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군 지휘부가 일본군의 공세를 계속 도와주는 셈이었다. 덕분에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지휘부는 물론 병사들 사이에서도 승전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됐다.


29일에 이르자, 러시아군은 랴오양으로의 집결을 완료했다. 이들은 랴오양 '전진 진지'에 대규모 병력을 조밀하게 배치했다. 일본군은 별도로 예비대를 편성하지 않았고,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공세에 나섰다. 핵심은 정면 공격과 더불어 후방에서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기 위해 타이쯔허 우안으로 도하하는 것이었다. 구로키는 도하 시점에 맞춰 랴오양 진지에 대한 공격을 명했다. 390문에 달하는 포에서 일제히 포격이 이뤄졌다. 일본군은 수수밭을 통과해 적군 진지에 빠르게 접근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중간에 참호를 구축했다. 이때 러시아군 예비대 소속 1개 연대의 진격으로 일본군을 몰아낼 기회가 있었지만 러시아군 지휘부는 과감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점에 진지의 또 다른 지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포격과 우회 공격 등을 구사했지만, 러시아군의 적극적 반격으로 실패했다. 쿠로파트킨 등 러시아군 지휘부는 잇따른 방어 성공으로 잠시 고무됐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이 타이쯔허 우안으로의 도하에 성공했다. 도하 소식을 접한 러시아군 지휘부는 또다시 석연치 않은 명령을 하달했다. 모든 부대가 랴오양 '주 진지'로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전진 진지 방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일순간 무용지물이 됐다. 기실 도하한 일본군 전위대의 전력(1.5개 사단)이 비교적 약했음에도, 러시아군은 선제적 타격을 가하기는커녕 냉큼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그만큼 당황한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전개로 인해 자신들의 후방이 크게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부실한 첩보 활동으로 일본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했고, 우세한 전력과 유리한 상황을 살리지도 못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 지휘부의 후퇴 지향적 성향을 간파해 과감한 전개를 단행했고 성공한 셈이었다.


랴오양 전진 진지를 장악한 일본군은 정면이 랴오양 주 진지로 향하는 진지를 새로 축했다. 타이쯔허 우안에는 일본군이 증강 배치됐고 좌안에도 일본군이 잔류했다. 우안의 일본군은 조만간 진격을 개시했다. 눈에 띄는 움직임은 9월 1일 포병의 지원 하에 (주요 거점인) 네진스카야 언덕으로의 진격이었다. 포격이 강력해 러시아군은 언덕을 방어하는 스관툰 진지로부터 후퇴했다. 뒤이어 언덕을 둘러싸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격전 끝에 네진스카야 언덕~스관툰 진지를 장악했다. 러시아군은 즉각 반격을 도모했다. 기실 타이쯔허 우안에서 병력 우위에 있던 러시아군은 빼앗겼던 네진스카야 언덕을 탈환하려 했다. 빌데를링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촘촘한 수수밭을 헤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워낙 거셌고, 러시아군은 보병과 포병의 합동 작전이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군은 지형을 활용해 적군의 포격을 피했으며 정밀한 소총 사격을 가했다. 무리하게 정면 공격을 감행했던 러시아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막대한 손실만 입고 목표했던 바를 달성하지 못했다.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도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우측을 공격하는 동시에 좌측을 포위했고, 포병을 적절히 활용해 큰 효과를 봤다. 반면 러시아군은 수수밭에 갇혀 자중지란에 빠졌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강력한 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지휘관인 오를로프도 부상을 당했다.


마침내 일본군은 랴오양 주 진지에 대한 공격도 개시했다. 200문 이상에 달하는 포가 하루종일 불을 뿜었다. 러시아군은 참호 속에 재빠르게 숨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 일본군의 정면 공격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동안 러시아군 지휘부가 강조했던 바대로라면, 바로 이쯤에서 러시아군의 응집된 전투력이 발휘돼야 했다. 이때를 위해 랴오양 길목에서 전략적 후퇴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집된 전투력이 발휘되기는커녕, 이번에도 어처구니없는 후퇴를 단행했다. 군수 물자와 예비대 부족 등으로 진지를 오랜 기간 사수하기 어렵다는 비관적인 보고가 올라왔고, 결정적으로 일본군이 조만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봉천'(선양)을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가 큰 영향을 미쳤다. 쿠로파트킨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전군에 봉천으로의 후퇴를 명했다. 점점 지쳐가던 일본군은 뜻밖의 결정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뒤늦게 추격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럴만한 여력과 시간이 부족했다. 적군 지휘부의 무능 등에 힘입어 일본군은 만주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 기지를 확보했다. 참혹한 대가도 뒤따랐다. 일본군은 랴오양 회전에서 전체의 약 20%에 해당하는 병력을 잃었다. 한편 러시아는 랴오양 회전의 패배로 크게 술렁였다. 국민들 사이에선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됐고 병사들 역시 패배주의에 함몰됐다. 군 일각에선 혁명 사상이 침투해 차르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크게 갉아먹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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