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양 회전 이후 봉천으로 퇴각한 러시아군은 차르 정부의 극동 정책을 주관하는 '알렉세예프'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계속 주둔하며 전력을 증강시켰다. 이 시기 총병력은 21만 명이었다. 다만 적지 않은 병력을 측면이나 후방 방어로 차출하면서 정면 전투력은 약화됐다. 일본군도 점령지에서 당분간 진지를 강화하거나 전력을 증강시켰다. 총병력은약 17만 명이었다. 한편 차르 정부는 랴오양에서의 실패를 조속히 만회하길 원했다. 급속도록 민심이 나빠지고 혁명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포위돼 있는 뤼순을 구원함으로써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시종일관 무능과 수동적 방어를 선보였던 러시아군 사령관 쿠로파트킨은 이제 공세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했다. 러시아군은 뤼순으로 가는 길목이라 할 수 있는 사허, 번시호, 타이쯔허 우안 방면 등으로 진격해 군사 행동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러시아군은 이번에도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했다. 사전에 일본군의 전략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적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등의 특별한 공격 전술도 전무했고, 기병대를 산악지형에 배치하는 등 부대 배치도 엉망이었다. 쓸데없이 예비대를 크게 만들어 공격력을 약화시킨 것도 문제였다. 반면 일본군은 첩보 활동을 통해 러시아군의 계획과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여전히 러시아군이 소극적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쿠로파트킨은 당초 러시아군의 공격 개시일을 9월 28일로 잡았다가 석연치 않게 연기했다.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했다.10월 5일이 되자,러시아군(서부집단군)은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한 시위적 군사 행동의 일환으로 사허를 향해 진격했다. 일본군의 예상대로 소극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러시아군의 이동 속도는 극도로 더디었다. 또 다른 방면에서 이동하는 시타켈베르크의 러시아군(동부집단군)도 신속하지 못했다. 이들은 8일 적군이 있었던 볜뉴푸쯔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지만 이미 일본군은 철수한 상태였다. 큰 의미가 없는 볜뉴푸쯔 공격과 맞물려 렌넨캄프가 지휘하는 동부집단 러시아군이 웨이닝잉~번시호 방면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후퇴하긴 했지만, 이 역시 큰 의미는 없었다. 되레 러시아군의 더딘 진격으로 인해 일본군은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고 후방으로 이동했다. 그나마 서부집단 러시아군이 일본군 전위부대를 격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 있는 모습을 보였다. 동부집단 전선에서 렌넨캄프와 류바빈의 군대가 협력해 번시호를 공격, 적군을 추가로 격퇴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까지였다. 그다음 공세가 신속히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일본군의 우측을 포위 공격해 섬멸시킬 결정적 기회도 놓쳤다. 쿠로파트킨이 조심스러운 군사 행동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당초 주공격을 담당했던 동부집단 러시아군에겐 현 위치를 고수한 상태에서 전위부대를 통해 적 진지로 향하는 접근로를 정찰하라는 임무가 부여됐다. 우세한 병력 규모를 갖고도 과감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의 전반적인 모습을 목도한 일본군은 자신들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러면서 공세로 전환할 태세를 갖췄다. 10일 서부집단 전선에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됐다. 일본군은 솽룽쓰, 솽타이쯔~다둥산푸 등에 있는 적군의 주요 진지들을 잇따라 점령했다. 다음날에는 포병연대의 지원 하에 인더뉴루촌에서 공격을 전개했다. 러시아군은 강력한 포격과 백병전 등을 펼치며 거세게 저항했다. 초반 공세가 여의치 않았던 일본군은 사단 전체 병력을 동원해 재차 공격했다. 이에 가까스로 인더뉴루촌을 점령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이곳에 있는 일본군이 중앙 돌파를 시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반드시 탈환한다는 목표 하에 한밤 중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일본군이 큰 타격을 받고 퇴각했다.
이 즈음에 구로키가 이끄는 일본군이 러시아군 중앙을 겨냥한 공세에 나섰다. 한 예하 부대는 산오쉬산 대산괴 기슭으로 진격, 백병전 끝에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또 다른 부대는 우회와 포위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레스나야 언덕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굴곡진 지형을 통해 이곳을 적절히 포위하며 적군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근위사단도 와이터우산 대산괴와 와타나베산을 공격, 대산괴의 남쪽 능선 및 와타나베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군은 와타나베산을 탈환하기 위해 일본군과 치열한 야간 전투까지 벌였지만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중앙 진지를 사수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동부집단 러시아군이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3개 종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첸가오링, 투먼링, 투먼쯔링 고개가 표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고 야간 공격까지 감행했지만 잇따라 실패했다. 뤄퉈링, 훠자푸쯔 등과 같은 바위산도 공격했지만, 암석과 협곡 등으로 인해 좀처럼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이곳의 지형에 대한 사전 조사를 충실히 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더욱이 일본군이 암벽 정상의 엄폐된 진지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러시아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결국 동부집단 러시아군은 익숙하지 않은 산악 지형 공세에서 뼈저린 실패를 맛봐야 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본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여세를 몰아 12일 야간에 적군의 중앙에 있는 양자오산을 공격해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 (피아식별을 위해) 군용 외투의 왼쪽 소매에 하얀 붕대를 감고 착검을 한 일본군은 불빛 신호에 따라 맹렬하게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러시아군은 산 정상에서 일본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1500명이 넘는 일본군 병력이 소멸했다.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가 이어진 끝에 양자오산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라오쥔위, 몐화거우, 스리허촌 등 모든 전선에서의 야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일본군은 서부집단 전선 및 동부집단 전선에서 눈에 띄는 승리를 이어갔다. 강력한 기습 공격을 통해 서부집단 전선에 있는 러시아군(제17군단 등)을 물리쳤다. 동부집단 전선에선 군사 작전의 잇따른 실패로 사기가 크게 저하된 러시아군의 상황을 적극 이용했다. 러시아군이 사실상 공격을 포기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포병을 대거 동원해 적군의 측면을 강하게 두들겼다. 류바빈, 렌넨캄프, 이바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후퇴하기로 했다. 이제 쿠로파트킨은 초기에 보였던 공세가 아닌 익숙한 방어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차르 정부가 그토록 소망했던 뤼순 구원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 러시아군은 사허 경계선과 볜뉴푸쯔~가오투링 고개 등에서 방어 체제를 형성했다. 얼핏 보면 일본군의 추가적인 공세가 계속 성공할 것으로 전망될 수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제10군단과 제37사단 등을 물리치며 승리를 이어가기도 했지만, 상황이 마냥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넓은 전선에 걸쳐 전개한 러시아군은 부분적으로 큰 '선방'을 했다. 러시아의 88 여단은 거센 공격을 버틴 후 역공을 가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빌데를링이 이끄는 러시아군도 공세를 가해 오야마의 일본군이 모색한 포위 작전 계획을 무산시켰다. 더욱이 러시아군은 노브고로드산과 푸틸로프산 전투에서 의미 있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6일 일본군은 기관총 및 포격 세례를 퍼부어 노브고로드산 등을 점령했다. 쿠로파트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산들을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러시아군은 쏟아지는 일본군의 포격 및 기관총 세례 속에서도 끈질기게 공격을 감행했다. 적군의 전진 참호를 급습하는 등의 과감함을 선보였고, 치열한 백병전 혈투도 마다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3000명이 넘는 인명 손실을 경험한 끝에 노브고로드산 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군은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러시아군의 적극성과 선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양국 군대는 (뤼순을 제외한 지역에서) 한동안 공세를 중단하고 진지 및 전력강화에 몰두했다. 상호 간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지금껏 펼쳐진 '사허 회전'은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추후 회전에서 판가름이 날 것이었다.
■뤼순 공방전
상당 기간 포위 상태에 놓여있던 뤼순의 운명이 조만간 결정될 터였다.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일본군은 8월부터 뤼순 요새의 동부 구역을 겨냥해 반복적인 공격을 가했다. 과거 청일전쟁 때, 단 하루 만에 뤼순 요새를 점령했던 일본군은 이번에도 신속하게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뤼순 요새에는 약 6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군과 646문의 포, 62정의 기관총이 있었다. (겉보기엔 강력한 방어 요새처럼 보였지만 허점도 많았다. 신형 포가 부족했고 구식인 은폐 포대는 노출돼 있었다. 전반적으로 요새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군은 포격을 가한 뒤 수수밭을 가로질러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른바 '반자이 돌격'으로 일컬어지는 군사 행동이었다. 일본군이 용맹했을진 모르지만 매우 무모한 행동이었다. 러시아군은 무차별적인 기관총 사격으로 응수했다.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총탄 세례를 받고 쓰러졌다. 어쩔 수 없이 퇴각을 해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돌격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기관총 사격이 뒤따랐고 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운 좋게 강화 진지와 보루 인근에 접근하더라도 이내 총탄을 맞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노기 마레스케는 기본적으로 사무라이 정신이 강했으며 청일전쟁 때의 성공 경험(돌격전)을 재현하길 원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략의 부재로 인한 대규모 '학살' 유발이었다. 공세 초반에만 일본군은 약 2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과부적을 절감한 노기 마레스케는 병력을 충원하고 280밀리 곡사포까지 들여왔다. 평행호도 구축했다. 9월에 접어들자 일본군은 뤼순 요새 주변에 있는 산과 보루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의 핵심 목표는 비소카야산의 '203 고지'였다. 여기를 점령하면 뤼순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포격, 격침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무모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틀 만에 6000명 넘는 일본군 병력이 소멸됐고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진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다각형 보루에 대한 기습 공격은 성공했다. 아울러 일본군은 좁고 깊은 호를 파면서 조금씩 요새로 접근해 나갔다. 280밀리 곡사포도 가동해 요새의 콘크리트 구조물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10월에도 뤼순 요새의 동부 구역을 향해 집요하게 돌격했다. 이 역시 막대한 병력 손실을 낳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호재가 뒤따랐다. 어느덧 '대호' 작업이 상당히 진전돼 일본군은 강화진지 전면 제방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적군의 작업을 무산시키기 위해 좁은 호에 폭탄 등을 투척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1월 말에 접어들면, 동부 구역에 구축된 강화 진지의 모든 해자들을 일본군이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수한 희생이 동반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비슷한 시점에 일본군이 그토록 점령하길 원했던 비소카야산 203 고지 공략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결정적으로 일본군은 갱도를 파고 들어감으로써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했다. 5일 간 벌어진 비소카야산 203 고지 전투에서, 일본군은 1만 명 가까운 전사자가 나오는 처참한 소모전에 빠졌지만 가까스로 산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뤼순 공방전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12월, 비소카야산 203 고지를 통해 뤼순항에 있는 태평양 함대에 집중 포격을 가해 궤멸시켰다. 전세가 급격히 기운 가운데, 뤼순 요새 안에 있는 러시아군은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식량은 떨어졌고 질병이 확산됐다. 부상당한 병사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나뒹굴었다. 전투를 할 만한 병사들이 많이 사라졌고 사기는 급격히 저하됐다. 일본군은 다시 병력을 충원한 뒤에 거듭 공격에 나섰다. 마침내 러시아군 지휘관인 스테스셸은 측근들과 함께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1905년 1월 2일, 일본군은 뤼순 공방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많은 포로와 군수물자를 손에 넣었다. 이에 따른 대가는 참혹했다. 일본군은 약 10만 명에 육박하는 병사들을 잃었다. 여담으로 군대를 지휘한 노기 마레스케는 막대한 군사적 희생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라이 정신이 투철했던 그는 추후에 일왕을 찾아가 책임을 지고 자결하겠다고 선언했다. 일왕은 이를 만류하면서 "죽으려면 내가 죽은 다음에 죽어라"라고 말했다. 실제로 노기 마레스케는 일왕이 죽은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하튼 뤼순 공방전에 매달렸던 노기 마레스케의 일본군은 이제 오야마의 군대와 협력해 또 한 번의 대규모 회전(봉천 대회전)에 나서게 될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