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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Sep 14. 2024

'러일 전쟁'-봉천 대회전, 일본군의 우회 기동

[4] 대제국 격침된 전쟁사 최대 이변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격전을 묘사한 그림. 일본군은 봉천 회전에서 우회 기동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봉천 대회전

러시아군은 연이은 패전에 더해 국내에서 발생한 불길한 소식으로 또 한 번 흔들렸다. 1905년 1월 9일, 러시아 노동자들이 황제가 머무르는 겨울 궁전 앞에서 총격을 받고 대거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국내 소식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군 병사들은 크게 낙담했고 전쟁에 임하는 의지가 더욱 약화됐다. 자국민들을 함부로 죽이는 차르 체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됐다. 이는 봉천 회전이라는 중요한 결전을 앞둔 러시아군에게 상당한 악재로 작용했다. 일본군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대체로 승전을 이어갔지만 병사들의 희생이 너무 컸고, 당초 계획했던 전비 대부분을 소비했다. 점차 국력의 한계치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유럽 러시아로부터의 지속적인 증원군 도착과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트 함대'의 존재도 일본군에겐 부담스러운 요소였다.) 일본군은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고, 유리한 위치에서 조기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양국 군대의 전력이 집결된 봉천 회전을 러일 전쟁의 최대 승부처로 인식했다. 여기서 승리하면 원하는 바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패전이나 다름없을 것이라고 봤다. 이 당시 러시아군의 총병력은 약 33만 명, 포는 1266문에 달했다.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7만 명, 포는 1062문이었다.


기본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일본군은 이길 수 있는 전술을 고민했다. 핵심은 '우회와 포위'였다. 일본군 총사령관인 오야마는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의 지휘관인 '몰트케'가 스당 전투에서 구사한 전술에 주목했다. 한편에서 일본군(제5군)이 러시아군의 좌익을 포위 공격해 유인한 다음, 약 7만 명에 달하는 노기 마레스케의 부대(제3군)가 적군의 우익을 우회한 뒤 후방에서 가와무라의 부대와 합류해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전선의 중앙에 배치된 노즈의 일본군도 우회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터였다. 즉 러시아군의 신경을 좌익에 집중시켜 (결정타를 날릴) 노기 부대의 우회 기동을 은폐하고, 중앙의 러시아군이 양 측방으로 부대를 보내지 못하게 만드는 전술이었던 셈이다. 당시 만주 전장에선 우회에 필요한 공간이 충분했으며, 일본군은 우회 방면에서만큼은 전력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일본군 지휘부는 이번에도 러시아군이 중앙 돌파와 같은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작전 계획을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다. 노기 부대의 우회 기동을 예측했고 나름의 대비도 했다. 쿠로파트킨과 카울바르스는 3개의 종대를 편성한 뒤, 각 종대를 우익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진격시켜 노기 부대의 좌익을 포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든 부대가 일제히 공격하는 것이 아닌 차례로 공격하는 게 특징이었다. 다만 이러한 계획이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였다.


2월 말, 일본군은 계획대로 러시아군이 좌익에 신경 쓰도록 노력하는 한편 우회 기동을 준비했다. (노기의 부대를 노린 카울바르스의 러시아군이 적군의 우회가 시작되기 전에 포위 공격을 모색했지만, 공격태세 전환 및 진격이 느려져 무산됐다.) 3월 5일부터 일본군의 우회 기동이 시작됐다. 그런데 우회를 하는 노기의 부대 옆에 오쿠가 이끄는 부대(제2군)도 있었다. 오쿠의 부대 역시 노기의 부대와 함께 우회 기동을 한 뒤 후방으로 나아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우회의 길목에는 체르피츠키의 러시아군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는데, 이 부대에게 우회 기동이 노출돼 선제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전이 일어났다. 오쿠의 부대가 우회하는 체하다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 체르피츠키의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퍼부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사전에 예측하지 못한 공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호들갑스러운 체르피츠키는 일본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면서 상부에 과도한 지원을 요청했다. 러시아군의 신경이 오쿠의 부대에게 쏠려있는 동안 노기의 부대는 계속 우회 기동을 전개해 나갔다. 기실 오쿠의 부대는 노기 부대의 우회를 엄호하는 핵심이었던 셈이다. 한편 카울바르스는 노기의 부대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재차 움직였다. 그러나 뚜렷한 문제점들이 동반됐다. 카울바르스는 주변 여건상 많은 병력을 공격에 투입하지 못했고, 게른그로스의 33개 대대만을 활용할 수 있었다. 공격 전술도 양호하지 못했다. 상술했듯 카울바르스는 전 병력을 일제히 공격에 투입하기는커녕 단계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한 종대가 어떤 목표를 완수하면 그제야 또 다른 종대들이 나서는 것이었다. 한 종대가 목표를 완수하기 전까지 다른 종대들은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소극성과 후진성은 필연적으로 노기 부대의 우회 기동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러시아군 지휘부는 극심한 혼란까지 빚었다. 당초에는 노기 부대의 우회 기동을 주공격이라 여겨 이의 차단에 몰두했다. 그런데 오쿠 부대의 공격이 주공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원인은 체르피츠키였다. 그는 오쿠 부대의 공격은 강력하며, 머지않아 대규모 일본군이 이쪽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과장된 보고를 계속 올렸다. 소심했던 러시아군 지휘부는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노기 부대의 우회 기동은 지속돼, 러시아군의 후방인 봉천의 싼타이쯔~황제릉 지역으로 점차 나아갔다. 다른 지역에서의 일본군 전개도 노기 부대를 크게 도왔다. 특히 위훙툰 전투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 35개 대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군은 단 1개 여단에 불과한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는 무리수를 뒀다. 그만큼 위훙툰을 핵심 지역으로 봤기 때문이지만, 정작 중요한 노기 부대의 우회를 막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덧 성공적으로 전개된 노기 부대의 우회 기동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비로소 일본군 내에선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봉천 회전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긍정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노기 부대는 라우니츠의 러시아군을 공격하며 본격적으로 적군의 후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오쿠 부대 등도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감행하며 노기 부대를 계속 지원했다.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군 지휘부는 새로운 부대를 급히 편성해 후방으로 보냈다. 밀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라우니츠의 부대와 협력해 노기 부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약한 전력과 일본군의 새로운 압박 전술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즈음에 러시아군 지휘부는 일부 병력(제1군과 제3군)을 훈허 뒤편으로 퇴각시키는 등 벌써부터 물러날 조짐을 보였다.


9일에 이르러 일본군은 라우니츠 부대를 밀어내고 싼타이쯔를 점령했다. 후방뿐만이 아닌 다른 전선에서도 일본군은 적진을 부분적으로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앞과 뒤에서의 일본군 전개로 암울한 상황이 닥쳐오는 가운데, 쿠로파트킨은 전투를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퇴각할 것인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봉천에서의 전투가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10일 전군에 퇴각 명령을 하달했다. 앞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이 퇴각한다 해도 좀처럼 추격을 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국력의 한계로 강화 조약 체결이 시급했던 일본군은 이참에 러시아군 주력을 반드시 섬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예기가 꺾인 러시아군이 순순히 자신들의 뜻대로 나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노기와 구로키의 일본군은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맹렬히 추격하거나 퇴각로에서 별안간 나타나 총격과 포격을 퍼부었다. 러시아군은 여러모로 힘든 여건 속에서 퇴각을 이어갔다. 일본군의 가오칸 전선 돌파로 퇴각로를 급히 변경하기도 했다. 자칫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던 러시아군은 가까스로 일본군의 공격권 내에서 벗어났다. 30일 러시아군은 이미 파괴돼 있는 쓰핑 진지에 당도했고, 추후 강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여기서 머무르게 된다. 일본군은 매우 중요한 회전에서 절묘한 전술 구사로 승리했지만, 간절히 원했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점점 떨어져 가는 국력을 힘겹게 부여잡고 다음 결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봉천 회전의 여파는 러시아와 러시아군을 강타했다. 무능한 쿠로파트킨은 총사령관 직위에서 전격 해임됐다. 러시아군의 사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국내에서는 혁명과 반전 운동의 열기가 크게 고조됐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들불처럼 번졌으며 강화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차르 정부는 아직 전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장의 카드인 발트 함대가 먼 길을 돌아 전장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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