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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Oct 11. 2024

'태평양 전쟁'-미드웨이 해전, 대반격의 서막

[3]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1942년 8월,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에 기습적으로 상륙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

일본군은 남방 한계선을 더욱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파푸아뉴기니의 전략적 요충지인 '포트 모르즈비'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미국과 호주의 연결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일본군은 우선 라바울을 기지로 삼고 육해군 협동 공격부대를 편성했다. 뒤이어 동부 뉴기니 북쪽 해안의 라에-사라모아를 점령했다. 5월 4일이 됐을 때, 일본군은 모르즈비를 공격하기 위해 라바울에서 출격했다. 그런데 7일 해상에서 일본군과 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 항공모함인 요크타운에서 출격한 급강하 폭격기가 모르즈비로 향하는 일본군 함대를 발견한 뒤, 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격은 일본군의 경항모인 '쇼호'에 집중됐다. 요크타운 및 렉싱턴의 항공대가 쇼호에게 폭탄과 어뢰를 퍼부었다. 결정적으로 쇼호는 어뢰 공격으로 인해 내부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면서 침몰했다. 이날 일본군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비교적 큰 함정을 잃었고, 별다른 공격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8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양국의 정찰기들이 서로의 함대를 발견한 뒤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 항공모함인 '쇼카쿠'에서 발진한 뇌격기 등이 미군 항공모함인 렉싱턴과 요크타운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미군 항공모함에서도 함재기들이 날아올라 쇼카쿠를 공격했다. 한바탕 격전이 벌어진 끝에, 미군의 피해가 두드러졌다. 특히 주요 항모인 렉싱턴이 엔진실과 중앙제어실 등에 치명적 타격을 입고 침몰했다. 요크타운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침몰은 면했다. 대신 수리하는 데 무려 100일 가까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제 즉각적으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미군 항모는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2척뿐인 것으로 보였다. 일본군의 쇼카쿠는 공격을 받은 후 화염에 휩싸여 전투기들의 발착이 어려워졌다. 그나마 어뢰 공격이 모두 빗나가 침몰의 비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틀간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뚜렷하게 승리를 가져간 쪽은 없었다. 일본군은 일부 항모들이 손실을 입어 모르즈비 공격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다고 판단, 뱃머리를 돌려 후퇴했다. 이에 일본군의 모르즈비 공략도 무기한 연기됐다.


일본의 대본영에선 향후 진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과 해군 측에서 점령지 방어 강화, 호주 침공, 뉴칼레도니아-피지-사모아 점령 등 다양한 안들이 제기됐다. 이런 가운데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중부 태평양 방면(하와이)에 대한 공격을 강하게 제안했다. 아직 건재한 미군 '항공모함'들을 이곳으로 끌어내 격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야 강화협상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안은 환영받지 못했다.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으로 굳이 갈 필요도 없거니와, 이곳을 점령한 후에 보급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미군의 항공모함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중부 태평양 방면 대신에 피지-사모아에 대한 공격이 유력한 안으로 여겨졌다. 고집이 센 야마모토는 직위를 걸고 자신의 안을 관철시키려 했다. 계속 먹히지 않자 하와이가 아닌 '미드웨이'를 치자는 쪽으로 변경했다. 기실 하와이나 미드웨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대본영에선 야마모토의 주장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마지못해 미드웨이를 치기로 했다. 다만 지속적으로 미심쩍어했고, 육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알류샨 열도' 공격도 행하기로 했다. 야마모토의 작전에 일본 육군이나 항모기동부대가 제대로 호응할 지도 미지수였다. 그런데 야마모토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일본 본토, 그것도 수도인 '도쿄'가 미군에게 폭격을 받은 것이다.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미국 정부 내에선 군대와 국민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방안이 논의됐다. 그 결과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육상폭격기로 도쿄를 기습적으로 폭격하자는 안이 채택됐다. 제임스 둘리틀 중령을 중심으로 한 '둘리틀 특공대'가 이 작전을 수행할 것이었다. 폭격기 16대로 행해진 도쿄 공습은 일본에게 물리적으로 큰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대신에 정신적 피해가 상당했다. 경계 소홀로 일왕이 머무르는 심장부가 기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 유의미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미 항공모함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일본군 수뇌부는 물론 일본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일본군은 미 태평양 함대가 궤멸됐다는 식으로 선전해 왔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본영 내에선 미드웨이로 태평양 함대를 유인해 쳐부수자는 야마모토의 안이 적극적으로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당초 미드웨이 공격에 난색을 표했던 육군도 정예 상륙 부대를 제공하기로 했다. 야마모토는 독불장군에서 단숨에 선견지명이 대단한 지휘관으로 거듭났다. 이제 미드웨이 작전은 일본군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과제가 됐다. 5월 27일, 해군기념일을 기해 일본 연합함대 주력이 미드웨이로 출격했다. 항공모함 4척을 비롯해 수많은 함정과 항공기들이 동원됐다. 이와 함께 알류샨 열도 공격도 전개됐다. 만약 미드웨이에서도 일본군의 뜻대로 이뤄진다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올라설 것이었다. 6월 5일, 마침내 일본군 대함대가 미드웨이에 접근하자마자 1차 공격이 감행됐다. 함재기 108기가 날아올라 육상기지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중대 본부, 탄약고, 디젤유 저장소 등이 초토화됐다. 일본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미드웨이에 설치돼 있던 수많은 대공포에 의해 일본군 항공기들이 격추되거나 큰 손상을 입었다. 미군 잠수함인 '노틸러스'는 잠수함에 대한 대비가 부실했던 일본군 함대를 크게 괴롭혔다. (미드웨이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전투기들도 반격에 나섰지만 일본군의 제로센에 의해 무력화됐다.) 일본군은 멈추지 않고 2차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나구모는 대함용 어뢰, 철갑탄으로 된 폭격기들의 무장을 지상 공격용 폭탄으로 교체하라고 명했다. 미군 함대가 오기 전, 지상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서둘러 무기들을 바꾸려 했다. 교체 작업은 최대 120분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창 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긴급 소식이 전해졌다. 미군 기동함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는 첩보였다.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군은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들의 예상대로라면 미군 함대는 아직 꽤 먼 지역에 있어야 했다. 다급해진 나구모는 미군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폭격기들의 무장을 대함용으로 다시 바꾸라고 지시했다. 상술했듯 교체 작업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더욱이 상부의 강요로 병사들이 급하게 작업을 하느라, 항공모함의 격납고 등에는 위험한 폭탄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있었다. 이는 머지않아 일본군에게 '재앙'을 안길 터였다.  


일본군의 허를 찌른 미군 함대의 전개는 어떻게 된 것일까. 기실 미군은 일본군의 미드웨이 작전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미군의 암호해독팀이 사전에 일본군의 무선교신 내용을 해독한 것이다. 미군은 당시 최신형 장비를 통해 일본군의 다음 공격 목표가 'AF'라는 것을 알아냈다. 문제는 AF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였다. 이를 두고 미군 수뇌부에선 격론이 벌어졌다. 하와이, 남태평양의 어느 섬, 샌프란시스코 등 의견들이 분분했다. 이때 '로슈포르' 대령이 중요한 단서를 근거로 AF가 미드웨이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과거 일본군의 교신 중에 "AF를 지나가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당시 일본군이 태평양에서 지나갈 수 있는 지역은 미드웨이밖에 없었다. 다만 이 추정은 곧바로 수용되지 않았다. 대함대가 움직여야 하는 만큼,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새로이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체스터 니미츠' 제독도 확증을 가져오라고 종용했다. 로슈포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도출해 냈다. 증거를 잡기 위해 일본군에게 '허위 정보'라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는 미드웨이의 미군에게 "해수 담수화 장치가 고장 나 식수가 부족하다"라는 내용을 흘렸고, 이를 일본군이 쉽게 접수할 수 있도록 했다. 과연 로슈포르의 바람대로 일본군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일본군은 "AF에 식수 부족. 해수 담수화 장치가 필요할 것"이라는 교신을 날렸다. 암호 해독은 대성공이었다. 이로써 미군은 AF가 미드웨이라는 확신을 갖고 움직였다. 아울러 니미츠는 미군의 항공모함이 미드웨이가 아닌 남태평양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미끼도 던졌다. 이 역시 성공해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 초반에 항공모함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미드웨이로 향하는 미군 함대는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 잠수함 19척이었다. 추후 압도적 생산력으로 미군의 전력이 극대화될 것이지만, 아직까진 이것이 미군 전력의 최대치였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산호해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항공모함 요크타운의 가세였다. 수리 기간이 꽤 걸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미군은 단기간에 수리를 완료하는 데 성공했다. 정찰기를 통해 일본군의 동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미군은 3척의 항공모함으로부터 152기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겉으로 보기엔 전황이 미군에게 유리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은 '자중지란적'인 모습을 보였다.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한 비행대가 내부 갈등 등으로 인해 일본 함대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와해되고 말았다. 주요 지휘관들 사이에서 비행 방향을 놓고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고, 제8뇌격기 대대가 항명하며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부 전투기들은 연료가 떨어져 항공모함으로 되돌아가다가 해상에 불시착하기도 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비행대도 상공에서 편대 구성을 하려다가 제각기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각자 알아서 일본군 함대를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미군의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는 점을 방증하는 셈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가까스로 일본군 함대에 도달한 미군 비행대가 있었다. 앞서 호넷 비행대를 이탈했던 제8뇌격기 대대와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기 대대, 요크타운에서 출격한 비행대(제3뇌격기 대대 등)였다. 머지않아 이들은 일본군 함대를 겨냥한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참혹한 실패였다. 한꺼번에 공격해도 모자랄 판에, 미군 뇌격기들은 순차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이들을 호위하는 전투기들도 부재했고 뇌격기 어뢰의 성능도 좋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 함대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채, 베테랑 조종사들이 이끄는 제로센에 의해 전멸당했다.


초반 공격은 대실패였으나, 운명의 여신이 미군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 전투기들이 미군 뇌격기들을 상대하는 사이, 다른 쪽에서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 이들은 일본군 함대의 위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연료가 서서히 떨어질 즈음에, 우연히 (미군 잠수함인 노틸러스를 잡으려 한) 일본군 구축함의 항적을 발견했다. 이를 추적하다 보니, 마침내 일본군 함대의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대표적 항공모함인 '카가' 등이 뚜렷하게 보였다. 항공모함들을 정밀 타격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들이 형성됐다. 저공 비행하는 뇌격기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군은 고공에 있던 폭격기들을 재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일본군 전투기들의 방어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베테랑이었던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들은 카가를 겨냥해 맹폭을 퍼붓기 시작했다. 매우 급격하게 강하하면서 여러 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 연쇄 폭발은 피해를 크게 가중시켰다. 일본군이 급히 대함용으로 무기들을 교체하면서 사방에 어지럽게 놔둔 폭탄들이 '유폭'을 일으켰다. 카가는 치명타를 입고 침몰했으며, 그 안에 있던 1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전사했다. 뒤이어 일본군 항공모함인 '아카기'가 공격을 받았다. 갑판에서 제로센이 발진을 하려던 찰나,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아카기에게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폭격기의 폭탄은 아카기의 격납고에 떨어졌고, 카가 때처럼 대규모 연쇄 폭발이 발생했다. 아카기는 철저히 파괴된 뒤 침몰했다. 또 다른 일본군 항공모함인 '소류'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번엔 요크타운 소속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폭격기들이 날아오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눈치챈 일본군이 항공모함을 대응 가능한 위치로 이동시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폭격기들은 1000파운드에 달하는 항공폭탄을 함체 중앙에 있는 격납고와 함미 등에 명중시켰다. 여기서도 유폭이 일어남에 따라 소류는 앞서 침몰한 항공모함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거대한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되는 데에는 불과 5분 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항공모함 안에 수용돼 있던 수많은 항공기들도 미처 이륙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수장됐다. 매우 짧은 시간에 행해진 미군의 격렬한 공격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일단락됐다. 반면 개전 초반 승리를 자신했던 일본군은 크게 휘청였다. 미드웨이 해전의 무게추가 미국 쪽으로 급격히 쏠렸다.


일본군 항공모함은 '히류'만이 남았다. 당초 미군 뇌격기들이 히류를 노렸지만 격침시키지 못하고 전멸했다. 일본군은 히류에 있던 급강하 폭격기와 전투기들을 동원해 반격하기로 했다. 요크타운으로 돌아가는 미군 항공기들을 발견한 뒤 요크타운을 표적으로 삼았다. 미군은 레이더를 통해 일본군의 전개를 눈치챘고, 요크타운으로 돌아가던 항공기들을 다른 항공모함으로 보냈다. 요크타운에 있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적군을 겨냥한 공격 태세도 갖췄다. 일본군 폭격기들이 다가오자, 미군 전투기들은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개시했다. 항공모함의 대공포도 불을 뿜으면서 수많은 폭격기들이 나가떨어졌다. 이 와중에 전투기와 대공포를 기어이 뚫고, 요크타운에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한 폭격기들이 있었다. 이들은 요크타운에 폭탄을 날려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다만 신속한 수리로 요크타운은 침몰은커녕 정상적으로 기능했다. 일본군은 요크타운이 불능 상태에 빠졌다고 보고, 다음 표적인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요크타운을 엔터프라이즈로 착각, 뇌격기 편대를 동원해 재차 요크타운을 공격하게 됐다. 산호해 해전에서도 살아남았던 요크타운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어뢰 공격으로 말미암아 요크타운은 치명상을 입고 침몰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은 히류의 위치를 파악한 뒤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해 격침에 나섰다. 공격받기 전 히류는 나름대로 방공망을 형성했지만, 맹렬하게 치고 들어오는 미군 폭격기들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여러 발의 폭탄이 명중해 히류의 곳곳이 파손됐고,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다른 항공모함들과 달리 바로 침몰하지 않고 고속으로 항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히류는 서서히 침몰하며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졸지에 4척의 항공모함을 잃어버린 일본군은 전력의 열세를 절감했다. 해전을 진두지휘한 야마모토와 나구모는 피눈물을 머금고 일본군의 후퇴를 명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그야말로 일본군의 처참한 완패, 미군의 '대승'이었다. 이를 계기로 태평양 전쟁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미국의 '대반격'이 예고되는 것이기도 했다. (대본영은 미드웨이 패전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그 대신 알류샨 작전을 통해 애투, 키스카 섬을 점령했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과달카날 전투

8월 7일,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동부 뉴기니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툴라기와 '과달카날' 기습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일본군은 전황을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미군의 반격은 1943년 중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 봤고, 현재 벌어지는 작전은 그저 정찰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미군은 이 건설이 거의 마무리될 시점에 상륙했다. 미 해병대를 목격한 일본군이 저항하지 않고 정글로 도망치면서 미군은 과달카날 비행장을 무난하게 점령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미군은 뼈아픈 타격을 입었다. 과달카날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해상경계부대가 '사보섬 해전'에서 궤멸됐다. 미군 수송선단은 가까스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지레 겁을 먹고 하루 만에 철수했다. 과달카날의 미군은 제공권 및 제해권을 상실한 채, 적은 물자로 버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일본군은 폭격기와 구축함, 순양함 등을 동원해 미군을 괴롭혔다. 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극히 어려운 상황임에도 미군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악착같이 달라붙어 비행장 건설을 마무리했고, 영리한 방법으로 식량 문제를 다소 해결하고 적군의 공격을 회피했다. 부실하지만 어느 정도의 보급도 이뤄지면서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은 과달카날을 탈환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우선 916명의 선발대를 과달카날에 상륙시켰다. 원래 이 부대는 조만간 합류할 부대와 같이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과달카날에 있는 미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했고, 자신들은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무적의 황군인 만큼 단독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때 미드웨이 참패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본군 선발대는 무모한 진격을 감행했다. 미군은 현지인 등으로 구성된 수많은 첩보원들을 통해 이미 일본군의 상륙 소식을 접했다. 만반의 대비가 뒤따랐다.


일본군은 미군 진영을 발견하자마자, 착검을 하고 달려드는 이른바 '반자이 돌격'을 단행했다. 미군은 기다렸다는 듯, 중기관총과 경전차 등을 동원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자칭 무적의 황군이었던 일본군 선발대가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다. 부대를 이끌었던 이치키 대좌를 비롯해 대부분의 병력이 순식간에 소멸됐다. 살아남은 병력은 고작 100여 명에 불과했다. 전사한 일본군 병사들의 시체에 악어떼들이 달려들어, 사지를 이리저리 찢고 먹어치우는 끔찍한 광경도 펼쳐졌다. 얼마 뒤에 과달카날 동북 해안에서도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 '솔로몬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항공모함인 '류조'를 격침시켰고, 증파부대 수송선단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도 타격을 받았다.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가 중파당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선발대의 참담한 패배 이후, 일본군은 6000명 이상의 병력으로 재차 과달카날의 미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 2척을 갖춘 제3 함대도 신규 편성했다. 겉보기엔 완벽한 공격 작전처럼 보였지만, 얼마 안 가 일본군의 치명적 오판이 또다시 나타났다. 미군의 항공 전력이 부재할 것이라 믿고, 다른 작전을 위해 제3 함대를 철수시켰다. 기실 과달카날의 미군 '헨더슨 비행장'에는 항공모함 등으로부터 날아온 항공기들이 적지 않았다. 적군의 항모 공격으로 말미암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부득이 이곳에 온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항공기들을 중심으로 과달카날에서 정교한 '캑터스 항공대'가 새로 만들어졌다. 일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을 시도할 때, 미군 항공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해 공격을 감행했다. 허를 찔린 일본군은 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일본군의 무리한 상륙 시도는 계속됐다. (제공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행한 일련의 무리수들, 과거 연이은 승리에 도취한 자만과 '사무라이 정신'에 입각한 경직된 군사 문화 탓이 컸다.) 구축함과 목재 동력선으로 나눠 상륙을 시도했는데, 취약한 목재선에 탑승했던 일본군은 미군 항공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구축함에 탑승했던 일본군이 비교적 무난하게 상륙했으나, 미 해병대가 이제 막 상륙해 어수선한 일본군을 급습해 물자를 대거 빼앗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아울러 미군은 일본군이 남쪽에서 쳐들어올 것이라 예상한 뒤 탄탄한 방어선까지 구축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무모한 반자이 돌격을 감행했다. 주간이 아닌 '야간'에 공격이 이뤄졌다. 이에 미군은 곡사포와 항공기까지 동원해 대응했다. 결과는 일본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의 진격로인 남쪽 능선에 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추후 이곳은 '피의 능선'이라고 불렸다. 일본군 총병력의 70%가 전사했으며, 도망간 나머지 병사들은 섬 곳곳에서 질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잇따른 방어 성공으로 미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전력도 갈수록 강화됐다. 병력과 무기 충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과달카날의 미군은 점차 일본군보다 유리한 위치에 섰다. (이 시기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윌리엄 홀시 제독은 과달카날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10월, 독기가 바짝 오른 일본군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다시 과달카날 탈환을 노렸다. 이번에 일본군은 우선 헨더슨 비행장 등을 겨냥해 대구경 함포 사격을 가했다. 공격은 성공적으로 이뤄져 비행장과 항공기 등이 크게 파괴됐다. 그런데 미군의 초인적인 '회복 탄력성'이 또다시 발휘됐다. 비행장 활주로와 항공기를 끈질기게 수리했으며, 항공기에 주입할 연료도 가까스로 확보해 냈다. 미군의 항공 전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사실을 알 길이 없던 일본군은 미군의 항공 전력이 와해됐다는 판단 하에 구축함으로 긴급 상륙을 시도했다. 머지않아 미군 항공기가 나타나 공격을 가했고, 마침 비행장을 구원하러 온 항공모함 호넷과 구축함 등도 가세했다. 일본군은 상륙 지점에서부터 심각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 우여곡절 끝에 과달카날 섬에 진입한 일본군은 약해진 화력을 보완할 대안으로써 기습을 상정했다. 이를 위해 정글을 통과해 방어선 남쪽을 집중 공격하기로 했다. 다만 정글이 워낙 험난한 만큼, 공격의 핵심인 포들을 그대로 이동시키는 게 어려웠다. 해법으로 병사들이 모든 포들을 분해한 뒤, 그 부품과 포탄을 직접 들고 가기로 했다. 무거운 군장까지 메고 있던 병사들의 부담은 극도로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힘듦을 못 이긴 일부 병사들은 들고 있던 부품과 포탄을 무단으로 버렸다. 그러면서 일본군의 전력은 더욱 약화됐다. 치명적인 문제점은 또 있었다. 부대를 이끄는 핵심 지휘관들이 현지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고, 해괴한 명분을 들이밀며 무모한 돌격만을 강조했다. 주변에서 전멸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지휘관들은 오로지 일왕에 대한 충성과 강력한 정신력만을 언급하며 적군에게 맹렬히 돌격하라고 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대로 이번 전투도 일본군의 참담한 패배로 귀결됐다. 한편, 즈음에는 일본군의 제3 함대가 다시 와서 미군에게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미군 항공모함인 호넷을 격침시켰고 엔터프라이즈에도 타격을 가했다. 하지만 일본군도 수많은 항공기들을 잃었고, 항공모함인 쇼카쿠와 즈이호 등이 심각하게 파손됐다. 이 '산타크루즈 해전'으로 인해 미군과 일본군 모두 항공모함 전력이 잠시나마 부재하다시피 했다.


과달카날에서의 연이은 참패는 야마모토를 극히 회의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전투를 치르는 것은 소모전의 반복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군은 지쳐갔지만, 미군의 육상 및 항공 전력은 눈에 띄게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야마모토는 대본영에 과달카날 포기를 건의했다. 그러나 대본영은 다시 과달카날을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1월, 일본군 전함과 수송부대가 야간에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때 일본군의 해상 전력은 방어에 나선 미군의 해상 전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군 지휘관이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목표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자신이 타고 있던 전함이 다소 공격을 받자, (어둠의 영향으로) 충분히 유리한 전황임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곧바로 철수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본군은 이틀 뒤에 다시 비행장 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목표물에 함포 사격을 가했으나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되레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에게 거센 반격을 허용했다. 이후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제2 함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했다. 이번에는 미군 구축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선전했다. 하지만 어뢰 공격의 위협에서 벗어난 미군 전함들이 효과적인 작전을 구사하면서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미군 전함들은 근본적인 전력상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함대를 어느 정도 괴롭힌 후 외곽으로 물러났다. 이쯤에서 일본군의 오판이 반복됐다. 과달카날에 상륙할 수송선단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다고 보고 함대를 철수시켰다. 표적인 비행장에 대한 포격은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날이 밝자마자 일본군 수송선단 위로 미 항공기들이 거침없이 날아왔고, 곧바로 강력한 폭격이 이뤄졌다. 여기에 미 해병대의 무차별적인 포격도 더해졌다. 결국 일본군은 막대한 인적 손실은 물론 다량의 군수물자를 잃고 패퇴했다.


일본군의 공세력은 완전히 상실됐다. 반면 지속적으로 증강된 약 5만 명의 미군은 방어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했다. 당시 섬에 고립돼 있던 일본군은 야간에 구축함과 잠수함 등을 통해 수송된 물자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미군은 집요한 공격으로 해당 보급을 끊어버린 뒤, 12월부터 총공세를 감행했다. 곡사포와 폭격기 등으로 오스텐 산 등 일본군이 머무르는 곳에 맹폭을 퍼부었다. 일본군이 퇴각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미군이 상륙해 퇴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대본영은 과달카날 인근 지역에 급히 비행장을 건설해 과달카날 일본군에 대한 항공 지원을 모색했다. 이를 눈치챈 미군이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1943년 1월 말에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는 지역도 함락되면서,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대본영은 마치 대규모 공세가 있을 것처럼 기만함과 동시에, 구축함을 통한 필사의 철수 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미군은 여기에 넘어가 과달카날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그 사이 일본군은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미군이 일본군을 전멸시키진 못했어도, 과달카날 전투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대승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육상에서도 승리를 이어간 것이었으며, 조만간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적군을 혹독하게 밀어붙이게 될 '서막'이었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부터 미국 본토에서 막대한 군수물자가 전장으로 쏟아졌다.) 일본군은 오만한 태도와 경직된 군사 문화, 전략의 부재 등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무모한 돌격, 항공기가 배제된 '대함거포주의'에만 의존한 끝에, 핵심 자원들을 급격히 소모시키고 말았다. 기습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해 미국과의 협상을 이끌어내겠다는 당초 목표도 완전히 물 건너갔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난관에 빠져들 일만 남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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