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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Nov 08. 2024

'한국 전쟁'-북한군의 전격 남침, 필사의 지연전

[2] 냉전 시대 최악의 열전

북한군은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당시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의 모습.

■북한군의 전격 남침

북한군의 남침은 서해안의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의 강릉까지, 38도선 전역에 걸쳐 전개됐다. 한국군은 5시 30분 전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했다. 북한군의 주공격은 '동두천, 포천-의정부' 방면에서 이뤄졌다. 이곳은 서울에 이르는 단거리 접근로였다. 조공격은 서부 지역인 '옹진'과 '개성, 문산' 방면에서 이뤄졌다. 우선 옹진에서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한국군 제1대대는 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으며 속절없이 무너졌다. 예비대였던 한국군 제2대대가 역습으로 선방했지만, 우측 방어선에 있던 제3대대가 돌파당했다. 머지않아 북한군이 한국군의 주방어선을 동서로 양분하면서 옹진과 강령 등이 함락됐다. 개성, 문산에서는 4일 간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제6사단 13연대)은 송악산 경계진지 상에서 한국군(제12연대)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북한군 15연대가 별안간 기차를 타고 개성역으로 쳐들어와 한국군의 배후를 위협했다. 이 공격이 있은지 5시간 만에 개성이 함락됐다. 한국군은 민간 선박을 이용해 후방으로 퇴각했다. 이후 북한군은 개성에서 서울에 이르는 철교인 임진강 철교를 확보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론 임진강 상류인 가여울 지역에서 도하를 단행했다. 한국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임진강 철교 폭파를 시도했으나, 공병 중대의 기술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한국군은 2차 방어선인 임진강 차안의 파평산 등에서 반격을 모색했다.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해 북한군 전차를 공격했고, 적군의 공격이 지체된 틈을 타 과감하게 반격해 잠시 퇴각시켰다. 하지만 방어선 우측 지역이 곧 돌파되면서 3차 방어선인 봉일천, 금촌 일대로 후퇴했다. 북한군은 야간 공격을 감행해 이 방어선도 무너뜨렸다. 한국군(제1사단)이 반격을 시도해 한때 좌측 방어선 일부를 회복했으나, 북한군 전차의 공격과 측면 노출 등으로 인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의 주공격 지역인 서울 북방의 동두천, 포천-의정부 지역도 위기에 처했다. 이 지역은 개활지가 펼쳐져 있고, 서울로 향하는 도로망이 발달해 있어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동두천의 한국군(제7사단)은 1차 방어선인 경계 진지에 배치된 부대로 적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그 사이 의정부에서 훈련을 받은 부대를 2차 방어선에 배치하려 했다. 다만 배치를 완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들어왔다. 정면에서만 공격이 이뤄진 게 아니었다. 북한군 일부가 한국군 진지를 '우회'함으로써 전후방에서 동시 공격이 이뤄졌다. 허를 찔린 한국군은 고작 3시간 만에 1차 방어선이 무너졌다. 북한군이 2차 방어선으로 나아가려 할 때, 한국군 포병대대가 포격을 가해 진격을 잠시 지연시켰다. 한국군은 2차 방어선에 어느 정도 부대를 배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2차 방어선 부대에 탄약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방어가 취약해진 것이다. 결국 이곳마저도 허무하게 무너짐에 따라 북한군은 동두천을 점령했다. 포천 지역에 있는 한국군(제9연대)은 사전에 전쟁을 예상했지만, 군수물자 부족과 북한군의 전차 공격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전차 중대가 적군 전차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쪽에서 지원군이 오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끝내 동두천에 이어 포천도 함락되면서, 서울의 마지막 관문인 의정부가 적군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한국군은 5개 연대를 의정부 방어에 투입했다. 비교적 큰 규모였지만 내실은 좋지 않았다. 지휘계통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으며, 부대 간 협조도 긴밀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이 즈음 한국군 일부가 동두천과 포천 탈환을 위한 역공을 감행한 바 있다. 제7사단 1연대가 동두천을 넘어 소요산까지 진격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의정부가 함락되면서 빛을 바랐다.) 의정부 방어전 때,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우를 범했다. 한 연대가 쪼개져 차례대로 적군의 먹잇감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6월 26일, 한국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의정부도 내주고 말았다.


이제 '서울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국군은 창동에서 방어 진지를 마련하려 했으나,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미아리 일대로 후퇴했다. 27일 오후, 정릉-미아리-청량리 방면에서 서울 최후 방어선이 형성됐다. 북한군은 폭우가 쏟아지는 야간에 기마대와 전차로 2차례에 걸친 공격을 감행했다. 한국군의 방어선은 2차 공세 때 무너졌다. 2대의 북한군 전차가 기습적으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로 진입한 게 결정적이었다. 28일, 마침내 한국의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이었다. 앞서 육군본부는 북한군 전차가 서울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공병대에 '한강 인도교 폭파'를 지시했다.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해서였다. 피난길에 오르려 했던 서울 시민들은 졸지에 북한군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됐다. 한강 북방에서 전투를 수행했던 한국군은 한강교를 통한 조직적 철수 기회를 놓치고 개별적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병력 손실은 물론 상당량의 무기를 잃었다. 서울을 빠르게 점령한 북한군은 벌써부터 승전 분위기에 도취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시되는 일이 발생한다. 북한군은 곧바로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무려 6일을 지체했다. 미군 육상 증원군이 오기 전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한강을 넘어 남진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미국 공군의 폭격과 충분하지 못한 도하 장비 탓도 있었으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중동부 지역인 '춘천, 홍천 전투'와 '김포반도 전투'에서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유엔군 참전, 필사의 지연전

춘천은 남서쪽으로 서울, 수원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맡고 있던 한국군(제6사단)의 '김종오' 대령은 여러 정보를 통해 사전에 북한군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춘천 북방에 제7연대, 홍천 북방에 제2연대, 원주에 예비 제19연대를 각각 배치한 뒤 대비 태세를 갖췄다. 초반에는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소양강 북쪽 기슭으로 후퇴했다. 북한군은 소양강을 단번에 도하한 다음 춘천을 빠르게 점령하려 했다. 한국군은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심일' 소위와 포병대대가 눈부신 활약을 펼침에 따라, 북한군의 신속한 소양강 도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후 한국군은 북한군의 소양강 도하 시도를 재차 방어했고, 나아가 반격까지 감행해 북한군 제17연대를 궤멸시켰다. (홍천에 있던 한국군은 2차 방어선인 어론리 일대까지 단숨에 밀렸지만, 반격을 감행해 고지 일부를 탈환했다.) 춘천에서 예상치 못한 거센 반격을 당한 북한군은 홍천에 있던 일부 병력까지 춘천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럼에도 곧바로 소양강을 건너지 못했다. 그나마 27일 북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해 전과를 올렸다. 소양강을 도하한 뒤 춘천 시내로 진입해 봉의산을 함락시켰다. 퇴각은 했지만 한국군은 굴하지 않고 분전을 이어갔다. 춘천-홍천 간 도로 및 말고개-홍천 방면에서 효과적인 지연전을 전개했다. 말고개에선 '김학두' 일등 중사와 대전차 특공대가 자신들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분전하면서, 북한군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춘천에서 한국군 제6사단의 혁혁한 공로로 말미암아, 협공에 기반한 북한군의 한강이북 포위 섬멸 계획은 물 건너갔다. 이로써 한강 방어전도 가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초전에 북한군의 진격을 더디게 만드는 결정적 효과를 낳았다. 분개한 김일성은 춘천, 홍천 전투를 담당한 2군단장을 보직 해임했다.


김포반도에서도 한국군은 눈에 띄는 성과를 달성했다. 춘천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이 신속히 뚫렸다면, 한강 이북의 한국군에 대한 포위 섬멸이 이뤄져 한강 방어선이 무력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김포반도에서 3일 간 지체했다. 한강의 빠른 유속 등이 도하를 방해했고, 급조된 '김포지구사령부'가 결사 항전을 했기 때문이다. 춘천과 김포반도에서의 분전으로, 한국군(시흥지구전투사령부)은 측면 위협에 시달리지 않고 '한강 방어전'을 수행했다. 병력 약 3000명이 한강 남쪽 방어선에 배치됐다. 무기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오로지 미군이 증원되는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 북한군은 6월 30일부터 노량진-신사리 방면, 여의도-영등포 방면 등을 향해 도하 작전을 전개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더해 미국 공군이 폭격으로 힘을 보탰다. 한강 방어선은 상당 기간 존속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봉착했다. 7월 3일, 북한군이 철로를 복구한 뒤 전차와 병력을 차례로 도강시키면서 한국군 방어선이 급격히 무너졌다. 이때 김포의 북한군도 뒤늦게 진입하면서, 협공의 위기에 처한 한국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초전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한강에서 무려 6일을 버티면서 회생의 단초를 마련했다. 단기간에 남한 전역을 석권한다는 북한군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남침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즉시 한국을 사수하기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라고 명했다. 미 극동군사령부 사령관인 맥아더로부터 '지상군 투입' 필요성을 건의받은 후에는 곧바로 이를 승인했다. 6월 26일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침략을 규탄했고, 즉시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뒤이어 한국을 '무력 지원'해 북한군을 격퇴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미국 주도로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된 데 이어 '유엔군'이 탄생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 16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에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워커' 중장을 비롯해 미 극동군 사령부에 있던 주요 참모들도 유엔군 사령부에서 일하게 됐다.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던 미국이 북한 침략 직후에 적극적으로 한국 사수에 나선 이유는 '도미노' 효과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된다면, 극동아시아에 있는 여러 국가들이 공산화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을 정점으로 한 공산주의의 팽창 야욕을 초반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아울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됐을 때, 소련이 취한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임이사국이었던 소련이 한국을 무력 지원한다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 참전은 이뤄질 수 없었다. 소련이 불참함에 따라 결의안은 통과됐고 유엔군 참전도 가능해졌다. 왜 그랬을까. 소련은 북한을 의식해 결의안에 찬성할 수도, 미국을 의식해 결의안에 반대할 수도 없었다. 애매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예 불참과 기권을 선택했던 것이다. 국제 사회의 움직임으로 전황에 변화가 생겼다. 한국군 단독 작전에서 벗어나 '한미 연합전선'이 형성됐다. 한국군은 부대를 재편성한 뒤 중동부 지역을 맡았고 서부 지역은 미군에게 인계했다.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넘어갔다. 머지않아 전세 역전이 일어날 것이란 희망도 생겨났다. 하지만 희망이 현실화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미군은 쓰디쓴 참패부터 맛봤다. '스미스 특임부대'는 오산 북쪽의 죽미령에 진지를 마련하고 북한군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진지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30여 대의 북한군 전차가 밀려왔다. 스미스 부대는 곡사포 등으로 반격했으나, 굴하지 않고 오는 적군 전차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전차로 인해 한바탕 혼란에 휩싸인 스미스 부대의 양옆으로 북한군 보병이 밀려들었다. 몇 시간 만에 스미스 부대의 3분의 1이 전사하는 참극이 뒤따랐다. 당초 북한군을 얕잡아 봤던 미군은 큰 충격에 빠졌다. 죽미령을 돌파한 북한군은 곧바로 평택-안성 방면으로 남진했다. 미군(제34연대)은 방어에 나섰지만 이번에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34연대 장병들이 스미스 부대를 격파하고 내려오는 북한군 전차에 지레 겁을 먹었다. 이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천안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초전에 급하게 투입된 미군은 매우 취약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정상 전력을 갖춘 미군이 속속 투입됐다.) 미군은 암담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천안에서 연대장을 교체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무모하게 적군에 맞서다 즉사하고 말았다. 미군은 또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압도적인 제공권이 미군에게 위안을 선사했다. 이 시기에 미국 공군은 남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전차 40여 대 등을 공중 폭격으로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국군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 많은 중부 전선에서 분투했다. 서부 전선에 있는 미군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려 했다. 진천-청주 방면이 첫 시험대였다. 7월 9일 북한군(제2사단)은 전차와 포병 등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한국군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방어진지를 구축한 진천 남단의 문안산-봉화산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해당 지역을 빼앗겼다가 다시 탈환하곤 했다. 한국군은 어느 정도 방어하다가 청주 북방의 미호천으로 철수하려 했다. 이때 북한군은 퇴로를 차단해 적군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한국군은 묘안을 발휘했다. 유엔군에게 네이팜탄 폭격을 요청, 북한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힌 뒤 무사히 철수했다. 한국군은 미호천에서도 북한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북한군이 집결해 있는 지점에 기습적인 포격을 퍼부어 수백 명을 소멸시켰다. 얼마 뒤 북한군이 미호천과 방어선을 뚫고 문의-부강 방면으로 남진했지만, 한국군은 이미 대단한 전과를 올린 상태였다. 당초 북한군은 이곳을 신속하게 돌파한 다음, 공주-대평리 방면에서 진격해오는 다른 부대와 함께 '대전 협공'을 모색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지연전에 말려들어 대전 협공은 물 건너갔다. 이곳에서의 선방으로 한국군은 소백산맥 방면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도 벌었다. 한국군의 훌륭한 전과는 계속됐다. 음성 일대의 무극리와 동락리에서 북한군(제15사단)을 잇따라 곤경에 빠뜨렸다. 한국군(제7연대)은 경계를 허술하게 한 채 동락리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을 기습적으로 공격, 수백 명을 전사시키고 각종 무기도 노획했다. 이 전과로 제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 및 전원 1계급 특진을 받았다. 이후 한국군 제1사단이 전장에 옮으로써 제7연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운 좋게도 북한군의 오판이 뒤따랐다. 이들은 제7연대가 철수하자 한국군 전체가 부재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거리낌 없이 진격해 들어가던 찰나, 한국군 제1사단의 곡사포 공격이 가해졌다. 북한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패퇴했다. 한국군은 만회를 위해 달려드는 북한군의 추가 공세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계획에 따라 철수했다. 진천-청주에서처럼, 음성 지역에서의 지연전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한국군은 충주-문경-함장 방면에서도 북한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지연시켰다. 다만 제천에서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해 북한군에게 유리함을 제공했다. 당초 한국군(제8사단)은 제천에 집결했지만, 석연치 않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이동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8사단장이 명령 착오를 뒤늦게 알아낸 뒤, 다시 한국군을 제천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북한군에게 제천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한국군은 어쩔 수 없이 단양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에 나섰다. 여기서는 크게 선방했다. 남한강을 넘어 단양에 진입하려는 북한군을 7일 동안 막아냈다. 되레 남한강을 역도하한 뒤 북한군 전방초소를 급습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부전선에서의 한국군은 열악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미군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금강을 연하는 공주, 대평리 전투에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7월 14일, 공주 지역의 북한군은 목선을 타고 금강 도하를 단행했다. 여기서 미군의 허를 찌르는 공세가 전개됐다. 미군 방어 진지의 정면이 아닌 측면부터 공략한 것이다. 당황한 미군은 적절히 싸워보지도 않고 대전으로 퇴각했다. 공주 쪽이 무너지자 대평리 쪽에 있던 미군도 위기에 처했다. 보다 자유로운 기동이 가능해진 북한군은 대평리 쪽에 있던 미군의 후방까지 공략할 수 있었다. 결국 미군은 수많은 병사들과 군수물자들을 잃고 유성으로 퇴각했다. 이제 중부지역의 최대 요충지인 대전이 북한군의 표적이 됐다. 미군은 이곳에서 적군과의 결전보다는 최소 2일가량 버틴다는 목표를 세웠다. 포항에 상륙 중인 미군(제1기병사단)을 영동 지역으로 투입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19일부터 감행된 북한군의 대전 공격은 초반부터 매서웠다. 여러 대의 야크기가 공중에서 맹렬하게 폭격을 퍼부었다. 뒤이어 북한군 전차들이 밀려와 미군 방어선에 맹공을 가했다. 미군은 대전차 화기인 3.5인치 로켓포를 동원해 반격했다. 더 큰 위협은 따로 있었다. 북한군 1개 연대가 금산 및 옥천 방면으로 침투 기동해 대전 후방의 도로를 차단했다. 미군이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는 형국이 조성됐다. 진퇴양난에 처한 미군은 소부대 단위로 나뉘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었다. 대전마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미군은 당초 목표로 한 시간 벌기에는 성공했다.


한국군은 중부전선 다음으로 소백산맥 선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됐다. 여기서 또다시 선방한다면 낙동강 방어선이 효과적으로 형성되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북한군(제15사단)은 화령장을 돌파한 뒤 상주를 점령하고 대구 방면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방어에 나선 한국군(제17연대)은 뜻밖의 호재를 획득했다. 해당 지역에서 북한군 통신군관을 사로잡아 작전 계획서를 입수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한국군은 금곡리 주변에 매복해 북한군(제15사단 48연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별다른 걱정 없이 진격하던 북한군은 한국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들었다. 수백 명의 북한군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나아가 한국군은 동비령으로 북한 구원군이 올 것이라 예상한 뒤 그곳에 다시 매복했다. 과연 48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북한군 제15사단 45연대가 동비령 도로를 따라 진격해 왔다. 한국군은 기다렸다는 듯 집중 사격을 퍼부어 북한군을 궤멸시켰다. 다음날에도 이 지역으로 오는 북한군을 기습공격해 제압했다. 이로써 북한군의 상주 점령 및 대구 진격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효과적인 작전으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 풍기-안동 방면에서도 한국군(제8사단)은 북한군(제12사단)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풍기에서 교묘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북한군의 오판을 유도했다. 차량의 전조등을 켜고 해당 지역 일대를 왕복 운행함으로써, 마치 한국군이 철수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은밀하게 병력을 투입해 적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술에 말려든 북한군은 경계가 허술한 상태로 진격하다 맹렬한 기습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만회를 노린 북한군은 다른 사단까지 동원해 한국군에 대한 협공을 획책했다. 이때도 한국군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분투하다가 안동으로 철수했다. 안동에서는 내성천 일대와 외곽의 중앙선 축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의 전차 공세 속에서 한국군은 용감하게 지연전을 펼쳤다. 그런데 이때 미군이 호남 지역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을 감안해, 한국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여기서 어이없는 문제가 발생했다. 부대 철수와 관련한 논의가 길어지다가 철수의 호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끝내 낙동강으로 철수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적군의 추격에 고스란히 노출됐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동해안과 서남부 지역 전황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북한군(제5사단)은 동해안의 울진과 영해에서 한국군(제3사단)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열세를 느낀 한국군은 일단 전략적 후퇴를 한 뒤 반격을 도모하기로 했다. 북한군이 영덕으로 진입하자,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이 쏟아졌다. 한국군의 요청으로 유엔군의 지원 공세가 펼쳐진 것이다. 이에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한국군은 영덕을 일시적으로 탈환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북한군의 공세가 재개돼 영덕을 다시 내주고 말았다. 이후 영덕을 둘러싸고 한국군과 북한군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영덕 공방전은 재편성을 마친 한국군 제22연대가 새로이 투입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유엔군의 지원 하에 북한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면서 영덕 탈환에 성공했다. 북한군은 우회 기동까지 감행하며 영덕을 점령하려 했으나 무위에 그쳤고,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동해안과 달리 서남부 지역에선 북한군의 우회 기동이 빛을 발했다. 이들은 대전을 공략함과 동시에 후속 부대(제6사단, 제603 모터사이클 연대)로 호남 지역으로의 우회 기동을 단행했다. 후방으로 기습 침투해 적군을 포위섬멸할 계획이었다. 당초 미군(제8군)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가 포로 심문 및 통신 감청으로 뒤늦게 알아냈다. 당황한 미군은 이대로는 북한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7월 31일, 제8군 사령관인 워커는 전 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라고 명했다.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은 수많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지연전을 펼치며 여기까지 왔다. 미군 증원군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번다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워커 라인)에서 사생결단의 일전을 치러야만 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낙동강 방어선은 총길이가 약 200km에 달했다. 방어선 북쪽에는 산악 지형이 있고 서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했다. 워커는 지연전이 한창 전개될 때부터 이 방어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은 서부 지역인 마산-낙동리를, 한국군은 동북 지역인 낙동리-청송-영덕을 담당했다. 한국군 관할 지역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자,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연하는 Y선으로 축소 조정됐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후방에 예비 방어선인 '데이비드슨 선'도 설치했다. 이때 한미 연합군의 전력은 눈에 띄게 증강돼 있었다. 약 15만 명의 병력과 300여 대의 전차, 400여 문의 야포 등을 갖췄다. 지속적으로 증원된 결과였으며, 북한군의 전력을 이미 뛰어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낙동강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표면적으론 한반도 적화 통일을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러 문제점이 가중돼 공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병력과 무기, 군수물자를 상당히 잃었고 보급선도 과하게 늘어졌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조금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꽤 불리한 여건임에도 김일성은 8월 중에 부산을 점령해 적화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이에 북한군 전력 대부분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됐다. 자연스레 다른 지역의 방어는 매우 취약해졌다. 김일성과 북한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고지가 있었기 때문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북한군은 대대적인 '8월 공세'를 준비했다. 핵심 표적은 대구였다.


이를 간파한 미군은 대구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선제적 역공을 도모했다. 우선 마산을 확보한 다음, 사단급인 '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진주 탈환을 획책했다. 다른 미군 부대들은 킨 부대의 임무 수행을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매복과 기습 등으로 미군을 크게 괴롭혔다. 킨 부대가 목표 지점 인근까지 도달은 했으나, 북한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킨 부대 및 지원 부대들의 피해가 심각해졌다. 미군 지휘부는 한계를 절감하고 킨 부대의 작전을 중단시켰다. 비록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미군은 공세로의 전환과 마산을 안정적으로 사수할 기반을 마련했다. 8월 5일, 드디어 북한군(제4사단)도 공세를 개시했다. 이들은 우선 영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돌출부라고 불리는 곳을 한밤 중에 도하하기 시작했다. 이를 예상하지 못한 미군(제34연대)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한때 영산이 북한군에게 넘어갔다. 미군은 곧바로 예비대를 투입해 영산을 탈환했다. 나아가 미군(제24사단)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북한군을 낙동강 너머로 격퇴했다. 이 시기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 돌파 전략의 일환으로, 거제도를 점령한 뒤 마산과 진해항을 봉쇄하면서 나아가려고도 했다. 이때 '대한민국 해병대'의 눈부신 활약이 펼쳐졌다. 해병대는 17일 통영 일대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후 용맹하게 진격해 매일봉을 점령했다. 북한군은 이곳을 탈환하려 했지만, 해병대의 거센 반격에 휘말려 섬멸됐다. 원문고개에서도 해병대는 북한군 약 500명을 소멸시키며 승리했다. 해병대가 성공적인 단독 작전으로 통영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북한군의 거제도 점령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대'로 불렸다.


한국군은 안강, 기계 지역에서도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 다만 그 과정은 유독 힘겨웠다. 초반에 미군과 한국군은 북한군이 기계 방면으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 봤다. 험준한 산악 지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기가 바짝 오른 북한군은 산악 행군을 감행하며 도평동을 거쳐 기계까지 진출했다. 곧이어 경주와 부산 방면으로까지 진격할 태세였다. 이렇게 된다면, 중간에 있는 한국군 방어선이 절단됨은 물론 낙동강 방어선마저 무너질 수 있었다. 한국군은 일단 제25연대를 긴급 투입해 방어하려 했지만 격파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한국군은 새로운 전술을 입안했다. 북한군의 진격로인 안강에 일부 부대(제17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를 투입해 방어하면서, 그 후방인 기계에 또 다른 부대(수도사단 제18연대, 독립기갑연대)를 투입해 포위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관건은 북한군보다 먼저 안강에 도착해 계획된 작전을 수행하는 것. 이를 위해 북한군의 진격을 늦춰야만 했다. 이번에도 미군의 공중 폭격이 해결사 역할을 했다. 강력한 폭격이 이뤄지면서 북한군의 진격이 상당히 지연됐다. 그 사이에 한국군이 안강 도로를 선점해 방어에 나섰다. 아울러 기계로의 우회 기동이 순조롭게 이뤄짐으로써 북한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당황한 북한군은 기계를 탈환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 잠시 기계가 피탈되기도 했으나, 한국군과 미군은 특수부대의 활약 등에 힘입어 북한군 1000명 이상을 소멸시키며 최종 승리를 거뒀다. 한편 기계 전투가 한창 전개될 즈음에 포항에서도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나타났다. 북한군은 진격로인 영덕-포항 방면에 있는 한국군을 격파하고 유격대를 포항 시내까지 진입시켰다. 포항 북쪽에서도 적극적 공세를 펼쳐 한국군 제3사단을 고립시켰다. 제3사단은 구룡포로 필사의 철수를 단행해 기사회생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군은 민기식 대령이 지휘하는 부대를 기습적으로 포항 시내에 투입했다. '민 부대'는 미군 함포의 엄호 속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포항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하이라이트는 '다부동 전투'였다. 이는 대구의 북쪽 관문인 다부동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연합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예봉을 꺾어버린 전투였다. 미군과 한국군은 대한민국 정부와 미 제8군 사령부가 있는 대구를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북한군도 대구의 높은 전략적 가치를 알았기에 반드시 점령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선 양측 모두 다부동에서의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초반에는 북한군이 유리해 보였다. 전방에 있던 한국군(제1사단)이 방어선인 Y선에 도달하기도 전에, 북한군은 Y선 일부를 선점했다. 나아가 신주막 674 고지 등까지 점령함에 따라 다부동 피탈 위기감이 고조됐다. 북한 증원군까지 다가오는 가운데 미군과 한국군은 그야말로 사생결단식 항전을 감행했다. 우선 북한군에게 강력한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엄청난 양의 폭탄이 쏟아지면서 북한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그런데 북한군의 전투의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들은 폭격을 뚫고 집요하게 나아가 한국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미군은 예비대까지 투입해 한국군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전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다부동에서의 북한군 압력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더욱이 가산에 기습 침투한 북한군이 대구 시내로 박격포를 발사하면서 정부가 부산으로 긴급 대피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워커 장군은 미군과 한국군을 다부동에 추가로 투입해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 한동안 양 진영에서 대규모 부대가 투입된 혈전이 이어졌다. 먼저 물러선 쪽은 북한군이었다. 이들은 다부동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지역을 공략할 것처럼 보였다. 조만간 반전이 일어났다. 갑자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다시 다부동을 공격해 왔다. 다부동 고지와 계곡 등에서 피 튀기는 혈전이 난무했다. 고지에서는 한국군이, 계곡에서는 미군이 각각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선 한국군과 미군이 뚜렷한 우세를 보였다. 고지의 한국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낸데 이어, 야간 기습 등을 통해 적군이 차지하고 있던 주요 지점들을 탈환했다. 계곡의 미군은 일명 '볼링장 전차전'을 전개해 북한군 전차와 장갑차 등을 적잖게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결국 미군과 한국군은 결사적인 연합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다부동 점령 및 대구 진격을 막아냈다.


북한군의 8월 공세는 종결됐다. 부산은커녕 대구도 점령하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최후 공세인 '9월 공세'가 남아있었다. 북한군은 3개 사단과 기갑여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북한군의 전력을 감안할 때, 9월 공세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다면 더는 힘들게 될 터였다. 낙동강 방어선의 미군과 한국군은 지속적으로 전력을 증강했다. 미군이 추가로 증원됐고 영국군 보병 대대도 당도했다. 제공권과 제해권 장악은 물론이고 병력이나 무기 측면에서 북한군보다 확실히 우세했다. 9월 공세 방어 후, 대대적인 반격이 전개될 전망이었다. 마지막 사력을 다해야 할 북한군은 나름대로 적군의 허를 찌를만한 전술을 입안했다. 핵심은 주공과 조공으로 나눠 기만하는 것이었다. 먼저 창녕, 영산 지역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 실제로는 조공이었지만 마치 이것이 주공인 것처럼 위장했다. 미군은 영산에 예비대까지 투입하며 해당 지역 방어에 집중했다. 이 직후 북한군은 기다렸다는 듯 주공을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지역 등에 투입했다. 특히 왜관-다부동에서 북한군 105 전차사단 등은 미군(제7기병연대)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이전보다 더 강력한 북한군의 공세로 인해 미군은 하루에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끝내 버티지 못한 미군이 뒤로 후퇴함에 따라 대구가 또다시 피탈 위기에 처했다. 이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워커의 고민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전 군을 최후 방어선인 데이비드슨 선으로까지 후퇴시키려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만간 인천에서 실시될 '엄청난 작전'을 감안해 결사항전하기로 결심했다. 아울러 북한군의 공세 강도가 갈수록 무뎌져가는 점도 감안했다. 미국 공군은 이번에도 든든한 해결사로 기능했다. 북한군의 보급로 등에 정밀 폭격을 가하면서 공세력을 극적으로 떨어뜨렸다. 제공권 장악의 위력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었다. 9월 12일, 미군은 가까스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대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신령-영천 지역에서도 북한군의 우세가 나타나다가 극적으로 반전됐다. 초반에 북한군(제15사단)은 한국군 양 사단 사이에 벌어진 틈을 노렸다. 이곳을 빠르게 침투해 들어가 영천을 점령했고, 별안간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고조됐다. 그런데 북한군 15사단은 측면이 약점이었다. 북한군 8사단이 신령을 조속히 돌파해 이를 메꿔줘야 했다. 하지만 한국군(제6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북한군 8사단의 진격이 막히고 말았다. 전황은 일순간 뒤바뀌었다. 지원군 없이 영천 깊숙이 들어온 북한군 15사단은 한국군에 포위됐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퇴각을 단행했지만 한국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대부분 섬멸됐다. 뒤이어 영천도 탈환됐다. 이 전투를 끝으로 북한군의 9월 공세도 실패로 종결됐다. 이는 약 2개월 간 벌어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승리를 의미했다. 나아가 한국 전쟁의 전체 전황이 크게 뒤바뀌는 단초였다. 이후 미군과 한국군은 북한군이 예상하지 못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할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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