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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ug 20. 2023

다소간의 아쉬움에도 놓치기엔 아까운, <지옥만세>

유망주들의 드림팀

대관절 감상부터 말하자면 나는 기꺼이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꽤나 답답하고 불쾌해 아쉬움 또한 올라왔다. 물론 불쾌함을 느꼈다는 것 역시 그 정도로 작중 상황에 몰입했다는 이야기니, 어찌 보면 나름 긍정적인 감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우선 영화의 줄기는 신선했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동조자가 자살 직전 복수를 결심하고 가해자를 찾아간다는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여기에 더해진 사이비 종교 특유의 폭력적 구조와 분위기가, 극에 긴장감을 유발하고 이야기를 신선하게 인도했다.


학교폭력, 자살, 사이비 등등 듣기만 해도 무거운 소재들로 영화는 가득했지만, 그것들을 풀어내는 방식에서는 무게를 내려놓아, 무겁지도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도 않은 선에서 이야기를 슬기롭게 풀어갔다. 보통 이러한 토픽을 다루는 경우, 관객에게 이야기로부터의 감정에 더해 현실 속 사건들로 인한 분노까지 불러일으켜 쉬이 감정의 과잉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그렇게 쌓인 감정은 섞이고 넘치며 오염되어 결국 토픽 자체에 대한 피로감을 낳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지옥만세>는 영화를 오롯이 영화로 볼 수 있는 깔끔한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고개를 젖히고 싶었을 정도로 불쾌했던 이유는, 극을 이끌어가야 할 송나미(오우리)와 황선우(방효린)가 자기주장조차 펼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유약했기 때문이다. 그래, 필시 오랜 무시와 시달림으로 인한 것이겠지. 저렇게 왜소해질 정도로 박채린(정이주)에 대한 공포가 몸에 배어있던 것이겠지. 그런데 자살을 하겠다면서. 락스에 번개탄에 목줄까지 준비해서 끝내고자 했었으면서. 가해자를 마주 볼 용기조차 없으면서 어떻게 죽음과 맞설 생각이었을까. 복수를 하겠다며, 계획이 다 있다며. ‘친구’라는 호칭에조차 힘 있게 부정하지 못하던, 아니 부정하지 않던 송나미의 모습은 내게 있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죽지도 못해, 기스도 못 내, 떠나지도 못하고 용서는 또 안 해.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 나도 경험해 본 감정이기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에 고개는 당연히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리하겠다 저리하겠다 떠들지는 말았어야지. 빈 수레가 요란하다던가? 용기는커녕 객기조차 없던 아이들의 모습에, 어쩌면 저것이 더 현실적이라 할지라도, 장르적 쾌감은 무슨 그나마 있던 공감의 실마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나미는 살갑게 다가오던 명호(박성훈)에게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냐고 말하면서 일견 경계를 하는 듯이 비쳤지만, 실상 목사와 낙원에 대한 믿음만 없을 뿐 그는 이미 사이비 조직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폭력 속에 내던져져 외롭고 두려울지라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단 한 명이 존재한다면 그래도 힘을 낼 수 있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나미와 선우에게 있어 죽음이란 편해질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고자 했고, 그래서 채린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계획 중 그들이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들은 채린의 미래에 기스를 내지도 못했고, 원래 계획대로 스스로 삶을 끝내지도 못했다. 채린을 찾아 서울로 올라오는 모험을 겪고 사이비라 한들 공동체 속에서 관계를 쌓음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정신적 성장을 이루었던 걸까? 죽으면 편해질 텐데, 무엇이 그들을 살게끔 했던 걸까.


다짐을 지키기에는 그들이 너무 겁쟁이였던 걸까. 이제야 죽음의 깊이를 깨달았던 걸까. 어쩌면 정말 성장을 거쳐 지옥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화의 후반에서야 마침내 목소리를 내고 손을 잡아주던 두 사람은 우유부단해 보이던 이전과 달리 대단히 성숙하게 보였으니까.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인물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어 일종의 서스펜스를 자아내기로 선택했다. 덕분에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겠다는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되었지만, 이제껏 집중되지 않았던 타인들의 사건에 두 주인공을 휘말리게 한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 이들에게 성장의 계기가 되었을까? 특별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그들이 사이비의 일원인 양 계속 선교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자업자득이 되는 걸까? ‘업’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겠지만, 일단 그들이 위기에 처한다는 상황 자체가 납득되지 않았기에, 함께 아파하거나 탈출을 빌어주기에는 우리 사이의 끈이 너무나 가늘었다. 후반부의 폭주가 소재의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 혹은 특정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 구현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그 선택이 의도를 넘어 이야기적 어긋남까지 야기하고 말았기에 다소간의 아쉬움은 남고 말았다.


처음에 이야기했듯, 나는 이 영화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때 영화와 드라마 시장에서 학교폭력과 종교를 다룬 콘텐츠가 유행처럼 연달아 공개되고는 했었는데, 그러한 물결과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소재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지옥만세>가 더 반갑고 또 감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출연진에 대해서도 방효린 배우의 독특한 톤, 박성훈 배우와 이주원 배우의 핑퐁, 그리고 아역배우들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나 인상적인 지점들이 있었기에, 이 영화를 미워하기에는 놓치기 싫은 아까움이 너무 많다. 물론 개인적으로 불쾌함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분명 더 펑키하고 경쾌해질 다음 작품에게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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