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성장 에세이, 그런데 이제 영화를 곁들인
되돌아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숫자에 매달려왔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어도, 남들처럼 느끼지는 못했었기에. 미지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게는 숫자라는 척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은 얼마나 웃어야 하지?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혹시 내가 울어야 하는 걸까? 대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바라고 있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릿속으로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적의 답을 찾기 위해. 이런 반응 저런 반응 성공률을 비교해 가며 대화 속 미지수의 해를 찾고자 했다. 공감하고 싶어도 공감할 수 없던 내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뿐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자신의 어긋남을 인지하여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지만, 사실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어떠한 연산 과정을 거쳤건 간에 사람들은 돌아오는 모범답안을 기쁘게 받아주었으니까. 설령 그것이 공감이나 교감이 아닌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했을지언정, 점점 나 자신마저 겉과 속의 괴리에 가슴이 답답해졌을지언정. 당장 직면한 소통에 있어서는 커다란 불편함이 없었기에, 어린 나는 더욱더 숫자에 의존해 갔다.
아마 이 세상에 숫자만큼 알기 쉬운 것도 더 없겠지만, 분명 그만큼 잔인한 것도 또 없으리라. 타인과 나누는 소통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까지. 숫자가 주는 명쾌함에 빠져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수(數)로 환원하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수의 괴물이 되어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 숫자 딱지를 붙여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고, 오로지 그 가치의 크고 작음만을 절대적인 기준 삼아 혼자만의 틀에 박혀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거부한 채 스스로 우물 안에 뛰어들어간 한낱 올챙이와 다름없었다.
입시를 위해 논술을 준비하며 그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와 마주했을 때, 나는 레버를 당기지 말고 5명의 인부들을 선로 위에 방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야 다섯 정도는 희생되어야 언론도 정치도 더욱 기민하게 움직일 테니까.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다른 레일에 있는 1명의 인부와 비교하며 질문 속 인물들 사이에서 대와 소를 나누고는 하는데, 사실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는 1명이든 5명이든 50명이든 모두 다 자그마한 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단순히 지금 몇 명을 살릴 것인가에 매달리기보다는, 더욱 대승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으리라. 이 문제가 딜레마라고 불리는 만큼, 어느 쪽을 선택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된다. 그렇다면 저들의 죽음 자체가 아닌 그 뒤의 파장까지도 수식에 집어넣어야지. 인정이나 감성에 발이 묶이기 전에, 차가운 이성을 갖고 선택에 따를 손익부터 저울 위에 올려 봐야지.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저들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사회 체계의 성장을 위하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위로는 벽을 쌓고 아래로는 땅을 파며 다름을 거부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지만, 여전히 내게는 사람이 되지 못한 괴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얼마나 꼭꼭 숫자 속으로 숨었던 건지, 이 깊은 구멍을 메우고 저 높은 벽을 허물어 평범한 사람으로 거듭나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하물며 개구리가 되지 못한 올챙이인 나는 마음껏 점프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한 줌 한 줌 흙을 채워가며 하루하루 천천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나이만 먹는다고 시간이 흐른다고 누구나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른처럼 사고하고 어른처럼 행동하기 위한 경험이 축적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돌이켜보면 나는 수많은 경험들을 그저 피해오기만 했다. 통계치가 없어 풀어낼 수 없는 문제, 갈등으로 불거져 상처가 될 문제로부터는 줄곧 방향을 틀어 도망치기만 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 상실을 수용하는 경험, 그리고 기쁨을 나눠 받는 경험. 데이터는 많았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경험은 너무나도 부족했기에, 나는 아직도 겨우 다리 한쪽 펴지 못한 얼간이로 남은 거겠지.
그랬던 내게 나도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바로 영화였다. 이런저런 수치를 따져가며 갈등의 싹을 잘라 온 나와 달리,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자연히 부딪혔으며, 이윽고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조금씩 성장해 갔다. 누군가는 선생님이 되어, 또 누군가는 반면교사가 되어.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나를 앞으로 이끌어주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야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들 하니까. 그러나 이제야 겨우 바깥을 경험하게 된 내게는, 저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들이 그 어떤 수식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잠시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주인공 차정원(이선균)을 글에 끌어오자면, 작품의 처참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대한민국 상업영화계에 있어 상당히 독특한 개성을 지녔던 캐릭터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아니 세상에, 누구보다 정의로워야 할 우리의 주인공이 글쎄 국민의 생명보다 정무적 판단을 우선했다니. 피랍자 구출에 대한 회의로 시작된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는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향해 구조를 나서기 전 우선은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생사가 불분명한 인질을 구하겠다며 인력을 투입하고 물자를 투자하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손실을 불러오게 될지도 모르니까. 5개월이 넘도록 납치범의 요구가 전혀 없는 이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가능성은 충분히 산출해 낼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었다. 물론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만일 그 선택에 따른 결과로 국가가 흔들리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본말전도와 다름없지 않겠는가. 진동이 크든 작든 국가가 휘청이는 순간, 그 충격은 필시 인질들뿐만이 아니라 절대다수인 국민 모두를 휩쓸게 될 테니까.
다시 차정원에게로 돌아가, 사실 그와 같은 캐릭터가 완전히 새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딸을 지키려던 아버지였다는 점, 타 생존자들과 비교해 정보 우위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처음과 마지막이 대비되는 입체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다분히 영화 <부산행> 속 서석우(공유)를 떠올리게 했다. 차이가 있다면 사기업의 펀드매니저였던 석우와 달리 정부 행정관인 정원에게는 공직자 윤리가 뒤따랐다는 점으로, 이러한 그의 소속과 행적 사이의 괴리가 이야기 속 나름의 신선함을 자아냈다.
당신도 차가운 머리를 지녔군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남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그와 같은 캐릭터는 필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보다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적어도 수의 괴물이었던 나는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이 영화가 끝내 그의 변화와 희생을 보여주리라는 것은 지극히 자명했고, 변하고 싶었던 나는 스크린 너머의 그로부터 또 하나의 경험을 배우고자 했다. 이 정도로 나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기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애석하게도 영화가 캐릭터를 그저 대사 읊는 도구로 소모하여 안타까운 아쉬움만 남았지만 말이다.
정원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야 했다. 매정하다며 비난받고, 한심하다며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그래야만 겨우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시선은 비뚤어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작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내놓았는가. 조박(주지훈)의 방정맞은 말장난이나 딸 경민(김수안)의 무모한 생떼는 정원의 성장은 물론 작품의 흥행까지 가로막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만일 영화가 경박함 대신 진중함을 택했더라면, 그렇게 정원의 이성과 다른 이들의 감성을 대립시켰다면, 나아가 국가안보실장 정현백(김태우)과의 이성적이고 정무적인 충돌을 그려냈더라면. 분명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나에게 있어, 어쩌면 나와 같은 고민을 지닌 누군가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자기 계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