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속에 담긴 한계와 가능성에 대하여
세상에 이해와 공감만큼 인간적인 것이 또 있을까. '다 이해한다'든가 '나도 다 안다'든가. 인간의 오만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들 중 으뜸은 분명, 경솔하게 내뱉는 이해와 공감일 것이다. '당신이 뭘 알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사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애처로운 존재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인간이 내리는 이해의 대부분은 그럴싸하게 도출된 주관에 불과하리라. 우리는 타인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 채로 주관적인 경험과 한정된 지식에 근거하여, 상대방이 겪었을 과거와 그 속에서 느꼈을 감정의 근사치를 그저 한없이 추론할 뿐이다.
지나치게 염세적인 표현일까? 최근 주변으로부터 인간 혐오가 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나 자신의 말과 글을 계속해서 돌아보게 된다. 물론 나 역시도, 타인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고자 하는 공감의 시도에는 응당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다가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지언정,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그 마음씨는 분명 무엇보다 빛나고 아름다울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림잡아 결론짓는 경솔한 공감에까지 과연 그러한 가치가 존재할까? 어쩌면 한마디 말로 표현되어 버리는 손쉬운 행위들이,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이해를 생략하고 제자리에 머물게끔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주인공 안(카와이 유미)을 떠올려 보자. 그는 불우하다. 처참하다. 말 그대로 산 채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분명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의 온기는 느껴본 적 없었을 테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과 호의라니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다. 그렇게 매일 태어난 의미를 부정당하며 한낱 돈벌이 도구로서 소비되어 온 그였기에, 형사 타타라(사토 지로)와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서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기묘한 사건이었으리라. 어색하고 이상하며 믿어도 되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왜인지 끌리게 되고 기대게 되는 신기한 사람. 타타라에 대한 안의 인상은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그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안은 변하고자 했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각성제도 끊었고, 단번에 매춘도 그만두었으며, 마침내 어머니의 학대에 저항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변화를 지켜보며 나도 타타라도 함께 소리쳤다. 대견하다. 그리고 대단하다.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일이었으니, 결단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아마 이제까지의 인생 중 가장 큰 정신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냥 모든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황된 희망 따위 걷어찬 채, 어제처럼 오늘을 반복하는 편이 차라리 더 쉬웠을 텐데. 설령 그쪽이 훨씬 비참하고 괴롭다고 할지언정,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지금보다 덜 피곤했을 테니까.
하나둘 인연을 쌓아가는 안의 도전을 지켜보며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 걸음씩 안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내 마음속 응어리진 감정들은 나로 하여금 두세 걸음 뒤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제껏 안 역시도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던 삶을 겪어왔을 텐데. 이제 그만 멈추고 싶었을 정도로 외로운 시간에 눌려져 왔을 텐데. 삶이라는 것이 이리도 쉬이 바뀔 수 있는 것이었나? 몸에 눌어붙은 고통의 관성은 어디 갔지? 약에 취하지 않아도 잠들 수 있게 된 안의 모습이, 손목을 긋지 않아도 견딜 수 있게 된 안의 모습이, 어느새 나와는 달라져 버린 그의 모습이, 내게는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당시의 나는 나의 기억과 경험이라는 틀에 갇힌 채 그 속에서만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나름의 터널 속을 지나고 있었기에. 그런 나만큼은 그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고, 그러니 그의 비행도 모두 다 긍정한다고. 내 멋대로 그에게 나만의 이해를 피력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나 또한 영화 속의 악인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단지 이해와 공감이라는 이름표를 붙였을 뿐, 내가 안에게 쏟아내었던 것은 그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결국 안은 영화 안으로부터도 밖으로부터도 이기심 가득한 폭력을 받아내며, 그 모두를 소리 없이 견뎌내고 있던 것이다.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내려놓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안은 과거를 향해 돌아서지도, 제자리에 멈추어 주저앉지도 않았다. 분명 꿈도 희망도 진즉에 다 가져봤고, 좌절도 실망도 벌써 다 겪어봤을 텐데. 그에게는 타타라를 비롯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지독한 관성을 이겨낼 정도로 큰 힘이 되었던 걸까. 그런데 웬걸. 그 노력에 감응한 듯 손아귀에 꿈이 겨우 잡힐 것만 같던 순간, 소리 없이 묶여있던 팔다리의 족쇄들이 그의 삶을 이전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벗어난 줄 알았던 부모의 폭력은 다시금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버팀목이 되었던 멘토의 웃음은 배신감만 남긴 채 홀연하게 사라졌다. 급기야는 온 사회가 알 수 없는 팬데믹에 휩싸이더니, 힘겹게 엮어 온 소중한 인연들을 한순간에 가로막아 끊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안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물론 영화 속 꽤나 많은 이들이 그를 이해하려 했었고 또 그에게 공감하려 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 중 누가 안을 지옥에서 꺼내줄 수 있었던가. 안에게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선택 하나하나에 밀려 안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갈 따름이었다. 결국 안이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칼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마침내 칼을 잡은 그를 보며, 사람들은 과연 마음속에서 무슨 말들을 외치고 있었을까. 다 찌르고 복수하라? 내려놓고 무시해라? 각각의 방향성은 다르지만, 필시 모두 다 그를 위해 건넨 말들이었으리라.
처음에 나는 이렇게 외쳤다. 분노와 설움을 표출하라고. 학대의 가해자를 향해 달려들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안을 위한 조언이었을까? 복수의 길에 올라서는 순간 그에게 '새로운 출발'은 금지될 텐데. 어쩌면 나는 그저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 안에게 폭력을 부추기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 홀로 고민한 끝에 나는 새로이 외쳤다. 칼의 끝을 어디로 향하든, 이제는 당신을 위해 선택하라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행동을 긍정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살을 미화하고 그것을 권장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보다는 그 자신이 안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아닌 그의 목소리가 울릴 때까지 기다리고자 했을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심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안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 세상에는 죽음보다 고된 삶 역시도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끝까지 붙들어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이타적인 공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까.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언제나 선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당사자의 고통을 충분히 헤아린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확언할 수 없으리라. 인내와 헌신은 분명 희망으로의 과정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에 대한 순응을 아름답게 포장한 사회적 족쇄라고도 생각한다.
결국 단순히 그의 선택에 반응하는 것을 넘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숙고하는 것을 통해야만 우리는 진정한 이해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내가, 그의 끝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을까.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강요하는 것도, 반대로 세상에 환멸을 느낀 채 죽음을 속삭이는 것도, 이제껏 내가 거듭해 온 폭력의 역사일지 모르겠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상생적인 공감을 시도하기에, 그의 마지막을 보며 안도보다는 안쓰러움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아닌 그의 자리에서 안이 견뎌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들여다본다면, 그 선택을 이전만큼 섣부르게는 부정할 수 없으리라.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건네왔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렇기에 이 영화의 엔딩은 단순한 비관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지독히 씁쓸하고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조용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어떤 이해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때의 끄덕임은 필시 단순한 동의라기보다, 끝내 다다르지 못했던 공감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자 고백일 것이다. 설령 그는 떠나갔을지언정 비로소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기에, 나는 구태여 이 영화의 엔딩을 최선의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