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의 마음으로 본 영화, <넘버원>

충분했던 눈물과 부족했던 속죄의 이야기

by Veni Jun

개인적으로 영화 <넘버원>은 솔직히 소재부터가 반칙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집밥’이라니, 손자병법마저 뛰어넘는 백전불패의 필승 전략이 아닌가. 그 밥상을 앞에 두고 오롯이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 어머니의 집밥에는 평범한 식사와 구분되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반찬 맛은 어떠한지, 국의 간은 잘 맞는지. 이런저런 비판과 분석은 잠시 뒤로 밀어둔 채, 우선은 숟가락을 들어 밥 한 공기 비우고 싶게 하는 본능적 이끌림이 녹아 있다. 그것이 우리 혀에 각인된 어머니의 손맛 때문이든,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든, 어쨌거나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는 나도 몰래 무장 해제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머니의 집밥에 더욱 큰 의미를 두게 되는 것은, 필시 그 또한 끝이 있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어머니도,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도.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단지 그 끝의 일시도 사유도 우리가 알지를 못하기에, 삶에 방해되는 불안을 자연히 묻어두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당연한 매일은 결코 영원토록 계속되지 않는다. 언젠가 시간이 다 되면 일상은 내 곁을 떠나갈 것이며, 다시는 함께 만나 식사 한 번 못 하게 될 것이다. 설령 나 자신은 그 사실을 외면한다 할지라도, 내 무의식은 그 잔인함을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우리가 유한한 일상의 조각들로부터 이따금 이유 모를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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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몸이 취하는 일종의 방어 기제다. 만약 죽음의 접근이 온몸으로 느껴진다면, 어디를 쳐다봐도 눈앞에서 카운트다운이 계속된다면, 과연 우리는 엄습해 오는 공포를 마주한 채 이전의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며, 영화 <넘버원>의 주인공 하민(최우식)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이 가시화된 현실을 앞에 두고, 그는 불안과 사투하며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집밥만 먹지 않는다면 당장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불효자가 되기로 한 그의 결심이 비록 최선의 답은 아니었다지만, 내게는 그것이 불안에 쫓기던 그가 내릴 수 있던 가장 현실적인 선택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왜 불효자로 살아가는 걸까.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도, 사실은 행복한 말만 들려주고 싶은데도. 언제나 말을 뱉고, 쏟고, 엎은 뒤에야 나는 돌아서서 자책하고 후회한다.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감사와 사랑만 전하기에도 부족한 것이 시간인데. 그 불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정말로 밉고 또 미웠다. 세상 모든 자녀들이 나와 같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하민은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하며, 그것을 걱정하고 그것에 불안해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제 불안에 허우적대며 가시 돋친 말들을 되풀이해 온 사람이니까. 하물며 그에게는 남은 숫자가 보이기까지 했으니, 불안의 크기도 후회의 무게도 나보다 훨씬 더 막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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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민이 참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누구보다 걱정하면서, 또 그에 못지않게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모진 말을 뱉어내는 그의 모습 위에 나 자신이 선명하게 겹쳐 보였다. 상처를 주기 싫어 다른 상처를 주고 마는 영화 속 하민의 모습은, 어리석고 못난 나의 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몇몇 장면에서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와 나 사이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났기에, 똑같을 줄 알았던 그에게 나는 실망했고 상처받았다. 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단 말인가.


하민은 자신의 저주에 한없이 괴로워하면서도,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파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표정에서는 씁쓸함과 초조함이 보였고, 필시 스크린 바깥에서 그는 누구보다 강하게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영화에서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리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고, 그를 둘러싼 스크린 안팎의 우리들은 그 가시에 찔려 다치고 아파했다. 영화 속 은실(장혜진)과 려은(공승연)은 하민의 상황을 알고 그를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지만, 내게는 그가 쏘아댄 가시들이 여전히 귀에 박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또 소중한 연인에게. 본심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위해서였다 할지라도. 꼭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던 걸까. 그토록 심한 말을 어찌 던질 수가 있었던 걸까. 만일 그래야만 했었다면, 그는 그에 따른 벌도 받아야만 했다. 그저 다 잘 되었다며 웃으며 끝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아파하고 후회하며 속죄해야 했다. 숫자의 저주와 주변 사람들의 오해, 예기치 못한 발병 등 그가 기구한 삶을 보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범한 과오들이 모두 사라지고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게는 그 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의 기준에서 하민은 해피엔딩을 맞이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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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아쉬움과 커다란 불만에도 나는 영화 <넘버원>이 나쁜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플롯은 진부함을 넘어 지루함을 느끼게 했고, 최루탄식 눈물 코드는 여전히 개운하지 못했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문장을 남겼으니 말이다. 앞으로 내게는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기회가 몇 번이나 남아있을까. 감사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만큼 남아있을까. 이러한 마음을 극장 밖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파 외길을 선택한 영화의 정면 돌파는 오히려 깔끔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명절 가족 영화라며 무조건 코미디를 욱여넣은 기존의 사례들보다는 훨씬 보기 편한 영화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주인공의 고뇌가 더 조명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에 나는 끝내 실망하고 말았지만, 명절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범위의 아쉬움이리라. 그에게 해피엔딩이 과분하다 할지언정, 즐거운 명절에 새드엔딩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혹은 보고 왔다면, 하민의 해피엔딩에 만족한 이후에 우리 자신의 모습까지 한번 돌아봐 주기를 조심스레 부탁해 본다. 어쩌면 우리 역시 우리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에게 어느샌가 상처를 주어 왔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내가 <넘버원>을 나쁘지 않은, 나아가 착한 영화로까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나에게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기에. 부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그러한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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