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지 못한 기억 속의 목소리

<초(超) 가구야 공주!>는 누구를 비추고 있나

by Veni Jun

레트로 열풍이 불었을 때, K-POP 신드롬이 퍼져나갔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필시 불안과 부러움이었다. 나의 과거는 저렇게 빛이 날 수 없는 걸까. 인정받고 수용 받아 이어질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지금도 여전히 선 바깥 모퉁이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 물론 이는 고급문화도 주류문화도 아닌 서브컬처를 즐겨 버린 자들의 어찌할 수 없는 자학이다. 오타쿠와 히키코모리,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던 우리들이 자초한 어리석은 자박(自縛)이다. 그렇게 보이기 싫었고 그렇게 불리기 싫었다면, 그저 다른 것을 좋아하면 됐을 텐데. 교실에서부터 예능에서까지, 마치 온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조롱받는 듯했던 그 시절의 우리들은 대체 왜 자기 마음 하나 바꾸지를 못했던 걸까.


나를 말하자면, 그냥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듯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도 해봤고 자신의 취향을 원망도 해봤지만, 결국 나는 바뀌지 않았다. 그야 나는 그 문화가 너무나도 즐거웠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내가 즐기면서 살기 위해, 이어폰을 꽂아 귀를 막고 후드를 뒤집어써 눈을 가려, 나를 차단한 저 지독한 세상과의 접속을 이쪽에서도 함께 끊는 수밖에. 즉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혹은 타의에 의해서든, 살아남은 우리들의 플러그는 이 사회의 메인 단자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문화의 중심에서 빛나고 싶다는 나의 소망 또한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공상일 뿐이리라.



물론 누구나가 알다시피 세상은 분명하게 변화했고, 그 변화는 더욱 속도를 높이며 지금도 산개한 네트워크를 하나로 이어가고 있다. OTT 플랫폼의 성장과 모바일 게임의 노선 변경, 무엇보다 주요 소비 세대의 전환에 힘입어, 오타쿠 문화는 대중이 이용하는 주류 미디어와 연결되며 하나의 장르로서 양지화에 성공했다. 이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만이 아닌 극장판 애니메이션 역시 흥행을 거듭함으로써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애니송과 전파송도 밈으로서 채택되며 틱톡과 유튜브 등 숏폼 콘텐츠를 주름잡고 있다. 오타쿠 문화는 여전히 마이너(minor)하지만, 더 이상 마니악(maniac) 하지는 않은 듯했다.


하지만 오타쿠 문화의 많은 부분이 대중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고 한들, 무엇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출지에 대한 프레임 권력은 여전히 우리가 아닌 그들이 쥐고 있다. 대중들, 시쳇말로 인싸들이 선택한 애니메이션인 ‘인싸 애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널리 향유될 수 있는 작품의 기준은 결국 무엇이 해당 시기 대중의 입맛에 알맞게 적합하는가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소년 만화를 좋아하고, 미소녀 밴드에 열광하며, 성우와 버추얼 아이돌에게 환호하지만, 이는 결코 대중이 오타쿠가 되었음을 의미하지도, 오타쿠가 대중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제껏 그래왔듯, 몇몇 작품들이 저들의 기호와 맞닿았을 뿐이다.


실제로 서브컬처, 특히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컬로이드의 경우, 한국에서는 여전히 네트워크 음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예로부터의 실상이다. 실체가 없음에도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가상 악기와 같이, 보컬로이드는 사용자가 라이브러리에 저장된 목소리를 변형함으로써 노래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가상 가수 프로그램이다. ‘하츠네 미쿠’로 대표되는 보컬로이드 캐릭터가 소비자들에게 각 목소리의 주인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이를 단순한 음성 합성 엔진이 아니라 ‘가수’라고 표현하는 것에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그들은 육체가 없더라도 존재가 긍정되는 가상 공간의 가수이기에, 프로그램 사용자는 단순한 유저가 아닌 그들 보컬로이드의 프로듀서가 되고, 청취자는 그들을 사랑하는 팬덤의 일원으로 결속하여 문화를 형성해 간다.



그럼에도 보컬로이드는 한국에서 주류문화에 안착하지 못하였다. ‘니코니코 동화’라는 주요 플랫폼의 폐쇄성과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악성 팬들의 존재, 그리고 호불호를 유발하는 기계적 목소리 등은 서브컬처의 양지화 흐름에서 보컬로이드의 약진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그랬기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초(超) 가구야 공주!>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품의 소재 자체는 보컬로이드보다 버추얼 아이돌에 더 가까웠지만, 참여 아티스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모두 과거부터 현재까지 보컬로이드 문화를 개척하고 주도한 프로듀서들이었으니까.


심지어 특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삽입곡 <월드 이즈 마인>은 그 존재만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작품의 공개일을 기다리게 했다. 설령 이 작품이 보컬로이드 문화의 편향된 이미지를 뒤집고 대중화를 이루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즐겨 온 그 시절을 향해 조명을 비추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기대했다. 변두리를 겉돌던 나의 플러그가 드디어 오롯이 중심과 이어지겠구나.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던 우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랬기에 더 우리는 연결에 목말라 있었다. 우리끼리만의 결합에 끄덕이고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나 더 넓은 세상과의 연대를 꿈꿔왔다. 주류를 거부하고 비주류를 자처했지만, 반짝이는 그곳을 나 역시도 선망했다.



영화는 빛으로 가득했다.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청춘의 이야기에 무대를 감싼 조명까지 더해지니, 영화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빛은 끝내 즐거움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야 그 많고 많은 조명들 중 무엇 하나 나를 향해 빛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반드시 관객을 비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내가 빛나지 않을지언정, 주인공의 밝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절로 즐거워질 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는 이로하(나가세 안나)와 가구야(나츠요시 유우코)라도 제대로 비추었나? 조심스럽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자유로이 노래했고, 카메라는 그것을 화면 위에 담았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그들이 충분하게 빛나지 못했다고 느껴졌다.


그 원인은 필시 이야기의 빠른 템포와 얕은 깊이일 것이다. 대나무 공주 혹은 카구야 공주 이야기로 알려진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기반으로 삼은 이상 캐릭터나 배경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초(超) 가구야 공주!>는 너무 많은 것을 생략했다. 빼어난 작화와 음악을 걷어내면, 그 속은 대나무의 안과 같이 텅 비어 있었다. 가구야와 이로하가 저마다 어떠한 고민을 안고 있었는지. 왜 그들은 한 차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어떠한 상호작용을 거쳐 그들이 해피엔딩에 도전하게 되었는지. 영화의 빠른 진행 속에서 그들의 표정은 오롯이 포착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두 사람은 그저 단편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말았다. 철부지 같은 말괄량이에 강박에 사로잡힌 애어른. 실제로는 그리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을 것임에도, 영화는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주인공이 이러한데 하물며 다른 캐릭터들은 어땠을까. 훌륭한 성우진과 수려한 디자인이 아까웠을 정도로, 그들은 그저 소모되는 장치에 불과했다. 앞서 언급한 삽입곡 <월드 이즈 마인>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그 곡이 펼쳐진 무대는 극의 클라이맥스도 아니었다. 자유를 노래하는 작품의 이야기 속에서 그 무대가 나름의 위치성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앞뒤의 액션 시퀀스에 밀려 기대만큼의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렇다면 작품 중간에 덩그러니 놓인 그 곡의 역할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현재와 미래가 과거로 이어지는 이 영화의 흐름 위에서 그 곡은 서브컬처의 과거를 나타내야만 했을 것이다. 점차 가상이 중심이 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 앞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노래를 이어온 자들이 있었음을 피로하는 상징이 되어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는 그 곡을 단순한 팬 서비스 혹은 미끼 상품 정도로만 다루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 무대가 미적으로 아쉬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무대는 지나치게 유려했다. 보컬로이드 초창기의 투박함도, 자칫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할 수 있는 특유의 노이즈도 없이, 무대 위의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곳에 보컬로이드 팬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영화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주체를 통해 기존 곡의 커버 혹은 불러보았다(歌ってみた) 문화를 보여주었지만, 보컬로이드 장르는 여전히 호명되지 못한 채 음지에 머물러 있다. 성우의, 크리에이터의, 캐릭터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도 대중과는 이어질 수 없는 그대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향수에 의한 개인적 실망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이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감사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버추얼 아이돌이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재의 오타쿠 문화를 큰 거부감 없이 소개해 낸 점만으로도 또 한 층 더 세상은 밝아졌을 테니까. 그럼에도 구태여 이 글을 비평도 리뷰도 아닌 우울한 개인 에세이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은, 부끄럽게도 내가 느낀 아쉬움에 나 자신이 그만 압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찬란했음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건드려진 기억이 처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딱 한 소절, 아니 추임새 하나만이라도 그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영화는 미래를 향해 너무 빨리 달려갔고,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이 희생되고 말았다. 모티브가 된 원작의 틀을 깨고 해피엔딩을 그려내고자 한 시도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도 즐거움 가득한 결말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가 관객들의 과거와 캐릭터의 현재에도 시간을 투자했더라면, 우리가 무엇에 두근거렸었고, 저들이 무엇에 방황하고 있는지를 조금만 더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손에 든 플러그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변두리와 중심을 잇는 작은 목소리가 언젠가 다시 울릴 수 있기를 바라기에, 조금 더 기다리며 지금을 즐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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