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회 고위층이라 불리는 집안의 사모님들은 많은 공통점들이 있었다. 부유한 사모님들의 공통점은 누구나 예상이 가능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진하게 느꼈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집에 없다.
나는 주로 집으로 수업을 하러 다녔고 수업 시간대도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 다양했지만 학생의 어머님들을 집에서 보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평범한 가정집 수업을 할 때는 학생의 어머니가 밖에 볼일을 보러 나가 있다가도 수업 때가 되면 바쁘게 집으로 들어와 미리 집안 환기도 시켜놓고 환하게 웃으며 맞아 주셨는데...
재벌집이나 유력 정치인의 집에 수업을 하러 갈 때면 주로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집안에 들어갔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엄마가 없는 집은 아무리 도우미 아주머니가 쓸고 닦아도 썰렁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짠 했었다.
그런데 10년 정도 재벌집 수업을 하는 동안 딱 한 번.
모든 사모님들의 공통점에서 벗어난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유명한 전 장관의 딸이었고 일류대를 나왔으며 남편은 국내 굴지의 기업 창업주의 맏아들이었다.
전형적인 사모님 스펙이지만 그 어머님은 여느 사모님들과 달랐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그 큰 집안의 살림을 직접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 없이 삼시 세끼를 본인 손으로 직접 했다. 다른 주부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 하겠지만 하고 싶고,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모두 가질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귀찮고 힘든 일을 제 손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영재 어머님은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수업 중인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선생님 식사하세요" 하면서 꼭 저녁을 손수 대접해주셨다. 나는 그 집의 형제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두 아들과 나의 상을 각각 따로 차려서 내놓았다. 집안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상주하는 집보다 정갈했다.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 집안 곳곳에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무슨 반찬을 먹었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집의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영재와 영진이는 유명인사였다. 나는 영재와 영진이 (가명)를 내가 가르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 했다. 나는 주로 고위층 자녀들이 대를 이어 많이 다니는 K초 출신 아이들을 많이 가르쳤는데 K초 출신 어머니들 사이에서 영재와 영진이의 평가는 단연 최고였다. 말이 쉽지 최고의 집안이라고 자부하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실과 품격으로 칭찬받는 건 쉽지 않다. 아이들 사이에 훈훈한 미담이 들려오면 그 미담의 주인공은 8할이 영재와 영진이 였다. 그래서 나도 영재와 영진이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꼭 한번 가르쳐 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좋은 성적과 바른생활 태도와 인성의 비법은 그 어머니였다는 것을 그 집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다른 집 아이들과 영재 영진이의 단 하나의 차이는 어머니의 부재였다. 경제력, 부모의 학력, 집안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아이들 사이에서도 영재와 영진이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집에서 아이들을 살피고 아이들과 거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아이들 옆에 있어주었던 어머님 때문이었다는 것은 사실 비법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것처럼 여겨진다. 수능 전국 수석이 교과서에 충실했어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이의 성공의 조건은 조부모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도우미 아주머니의 사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아이는 아주머니의 사랑이 아닌 어머니의 관심으로 자라난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자식에게 제대로 관심을 쏟고 초점을 맞추는 부모는 드물다.
그렇다면 맞벌이하는 어머니를 둔 아이들은 어쩌라는 거냐?
집에 없어도 된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문제는 관심이지 집 죽순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수빈이(가명) 어머님은 20대에 창업해서 회사를 업계 2위에 올려놓은 자수성가형 워킹 맘이다. 중견기업 대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집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수백 명의 직원을 관리하고 업계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여성기업인으로 유명하지만 자식 앞에선 늘 초조한 보통의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밤 10시쯤 수빈이 집에 도착해서 수빈이와 남동생 찬우를 가르쳤다. 내가 수빈이 집에 도착하면 수빈이 어머님이 항상 수빈이 방에서 나오시면서 "선생님 오셨어요" 하고 맞아 주셨다. 3년간 수빈이 남매를 가르치면서 늘 10시쯤 수빈이 방에서 나오시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그런 상황이 반복되니까 좀 궁금해져서 수빈이에게 물어보았다.
" 수빈아 어머님 퇴근 빨리하셔?"
"아니요.."
"아니.. 회사일로 바쁘실 텐데 항상 니 방에서 나오시길래.."
"아.. 엄마는 9시에는 꼭 집에 도착하세요. 그리고 퇴근하고 오시면 제일 먼저 제 방에 들어오셔서 저랑 찬우랑 학원 숙제 학교 숙제했는지 확인하시고 학교 준비물 확인하시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10시에 선생님 오시면 그때 제 방에서 나가세요..
" 그렇구나..."
수빈이와 찬우 남매는 우리나라에서 서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이 들어가는 고등학교에 합격해 입학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해 꿈을 펼치고 있다.
수빈이 어머님은 아이들 공부문제로 가끔 전화를 주셨는데 통화를 하다 보면 자주 울곤 하셨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성적이 내려가면 자신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울먹이셨다. 수빈이와 찬우가 학업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한결같은, 지치지 않는 관심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숙제를 확인하고 준비물을 챙겨주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봐주는, 이걸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중, 고교 시절 내내 몇 번 거르지 않고 해주는 엄마의 노력을 아는 아이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끼고 앉아 공부를 가르치라는 소리가 아니다. 아이들 공부에 끼어들어 간섭하라는 말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 열나게 끼고 앉아 공부시키다 정작 가장 중요한 중고등 때는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느라 학교 과제가 뭔지 수행평가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혼자 착각하지 말자는 거다.
문제는 관심이다. 성적에 대한 관심 말고 아이에 대한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