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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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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Oct 12. 2023

가출 기록


가출을 했다. 그것도 밤 12시에.


내 안에서 일어난 불길을 피해 빠져나온 바깥세상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차가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차에 앉아 갑자기 낯선 곳에 가게 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만 색색거리며 쉬었다. 왠지 커다란 불길을 막 피한 사람처럼 불안감에 숨을 쉬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운전석에 있는 사람들은 말이 없이 내게 커다란 안전감이 되어주었다.


곧이어 익숙한 냄새가 나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 때 나의 온전한 거주지였지만 내가 성인이 된 후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는 곳. 집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내 집이 아니라 부모님의 집이었다.






6년을 연애하고 4년을 결혼생활 중인 남편과 크게 싸웠다. 오랜 시간 사소한 일들로 서로의 감정에 금이 가다가 어떤 말을 계기로, 감정은 결국 와르르 무너져 벽이 되어버렸다. 그 무너져 버린 벽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아픔을 알아달라 서로에게 소리쳤지만 그 말은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질 리 없었다.


결국 나는 늦은 밤 처음으로 가출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이 그 당시 나를,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밤늦은 시간, 나는 예상치도 못한 부모님 집에 와있게 되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웠다. 빨리 무언가를 찾고 해결해야 할 거 같았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지금은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쉬어."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에 난 이불속으로 들어가 생각을 꺼버렸다. 엄마는 말없이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 차를 마실 여력도 없었지만, 마시지 않아도 밤 사이 내 상처의 고름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음 날 아침, 환해진 세상 속에서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난 식탁에 앉아 '다 큰 어른이 무슨 사춘기 소녀처럼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걸까, 나는 역시 이 집안의 문제아구나'...라고 느끼면서 내 앞에 놓인 호박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호박죽에서는 사근사근한 김이 피어올랐다.


잠시 후 두툼하고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아무런 미사여구가 없는 그 따뜻한 온기는 그 순간 그대로 내 심장을 관통했고 나는 그만 눈물이 팍 하고 터져버렸다. 어린 시절 너무나도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언제나 어렵게만 느껴졌던 아빠의 손이었다.


우리는 별 말이 없이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 우리 사이에 아주 많은 말이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그 공기는 온기로 꽉 차있었다. 온전한 이해는 본래 고요한 것일까.






오후 시간이 되어 우리는 함께 걸었다. 걸으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매번 부모님을 힘들게만 해. 동생이 부모님께 자랑거리가 되고 행복을 줄 때, 나는 방황했고 짐만 되었어. 평생을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제자리네..." 그렇게 나는 나를 또 내 안에서 버리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호수가 보이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동생을 제외한 세 명이 이렇게 나란히 앉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아주 여러 가지 것들을 얘기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엄마였는 지 아빠였는 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별 상관이 없다.)


"우리는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언제나 네 편이야."


순간 잘 느끼지 못했던 시원한 가을바람이 살갗에 그대로 전해졌다. 회색빛이었던 내 세상이 갑자기 여러 가지 색을 찾아가느라 분주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물어봤다.


"... 만약에 내가 이혼을 한다고 하면... 괜찮아? 엄마아빠가 친구들한테 너무 창피할 거 같아. 결혼식도 그렇게 다 초대해 놓고 딸이 이혼했다고 하면..."


두 분은 말했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말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옛날에는 마음에 안 들어도 다 참고 살았지만 요즘은 안 그렇잖아. 그리고 네 행복이 제일 중요한 거야."


"네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해."


오래전, 오로지 가정과 자식들의 안위를 위해 자신들의 행복은 뒤로 놓고 산 분들의 말이었다.






많은 것들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부모님은 그 시절 그 세대가 그랬듯, 아주 많은 것들을 참고 사셨다. 그랬기에 어린 시절,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들의 삶을 보며 나도 비단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내내 행복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내 목에 족쇄를 걸고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응당 그래야 한다며 버티며 살았다.


그러다가 20살 초반,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했다. 바다 건너온 미국사람과 연애를 시작했고, 이 사람은 나에게 즐겁게 사는 법들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를 그 사람은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래서 그를 만날 때마다 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6년을 연애했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다시 내 본래의 정체성이 우세를 띄기 시작했다. 난 어느 순간 노는 것을 잘 해내지 못하는 심각한 얼굴을 한 아내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남편의 탓이라고 했다. 사실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성향이 이제야 드러난 것일 뿐일 텐데.


나는 불안했다. 나도 부모님처럼 많은 것들을 참고 살아야 하는지 불안했다. 그래야지만 이 세상 어느 한 귀퉁이를 차지해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마음 한 켠으로는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내 의지로 무언가를 인내하는 것은 잘 해낼 수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무언가를 인내하는 것은 내 역량이 아닌 것만 같았다.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해.



32살이 되어서 완전히 무너진 패잔병의 모습으로 나타난 여인에게 따뜻한 두 손이 보였다. 여인은 두 다리를 질질 끌며 그 손을 잡았다. 그 두 손은 그 여인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치유할 때 온전히 그 옆에 있어주었다.


나는 남편과 며칠에 걸쳐 긴 통화를 했다. 그동안 내 상자에 갇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남편의 말들이 이제야 들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원하는 것들을 분명히 얘기하고, 각자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도 공유했다.


현재 나에게는 안정감이 중요하다. 이민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내가 온전히 그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재 남편에게는 나의 신뢰가 중요하다. 이 또한 안정감의 한 부분이지만 커플 사이에서 여성이 원하는 그것과 남성이 원하는 그것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마치 조개껍질(남성) 속 진주(여성)와 같은 느낌이다. 즉, 안정감을 원하는 것은 같지만 서로 그것을 줄 수 있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그 둘은 자신들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함께 있을 때 더 안정적이다.  



노을이 진 바닷가에서 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나도 말없이 인지한다.


둘 사이에 태어난 작은 생명이 본인들의 품을 떠났다가 다 커져서 피폐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말없이 손을 내밀 수 있게 될 때까지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겪어내야 했을까. 그 침묵의 손을 내밀 수 있게 되기까지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해야 했을까.


어디로 뻗어가야 할지 모르고 혼란스러워했던 뿌리가 이제 비옥한 토양 안에서 다시 깊게 뻗어나간다. 사실 내가 뻗어나갈 수 있는 토양은 언제나 여기 이곳에 있었다. 단지 그 당시 뿌리는 아직 토양을 온전히 믿지 못했을 뿐. 그들이 이뤄낸 삶이 얼마나 그 당시에 최선이었는지를 그 어린 뿌리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믿음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리고 비단 그들에 대한 믿음이 아닌,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이는 본인의 몸으로 살아가는 데에 대한 안정감으로 이어진다.


뿌리는 이제 알고 있다. 세월이 흘러 토양의 영혼이 자신의 육체를 떠난다고 해도 이들은 언제나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토양은 언제나 뿌리 옆에 있을 것이라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아직은 내가 잘해낼 수 있을 까 조금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고통 속에서 온전한 뿌리를 깊게 하나 내렸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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