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몸의 노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은아 Oct 19. 2023

개운의 원칙


가출을 했다가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가출한 것이 무슨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삶을 살아가며 품에 꼭 간직한 비장의 카드로 갖고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  


반복적으로 하는 어떤 일에는 꼭 커다란 변화의 시점이 찾아온다. 그것이 하는 일이든, 관계이든 말이다. 왜냐하면 변화란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생명의 원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9월이 지나가면 10월이 찾아오고,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찾아오듯이.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성질을 잊은 채로 매일 별생각 없이 같은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삶이 나를 멱살 잡고 흔들어놓을 때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까지 온다면 이것이 꼭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은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압력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일 뿐일 텐데. 


'좋은 것이 좋은 거지' 하고 불편한 것도 내버려 둔다면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내 안에 기체 같은 것이 쌓여버린다. 겉으로는 좋은 것이 좋은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속 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고 있을까? 얘기해도 변화하지 않을 거라고 느껴져서? 나는 최선의 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서? 얘기하면 사람들이 유난이라고 할까 봐?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자전거의 기어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냥 그렇게 페달을 밟아가면 언젠가는 탈이 나기 마련이다. 삶에 있어서 무언가 불편한 감정은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잘 살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나는 이번에 가출을 통해 그것을 완전히 체화해 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부부의 관계가 훨씬 좋아졌다!)






내가 그나마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맞춰주지 않고, 고집스럽게 끌고 간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 몸이다. 


나는 어릴 적 몸이 약했다. 태어나보니 그냥 이 상태여서 변화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십 년을 '나는 원래 이렇군' 하면서 반포기하듯 살았는데 20대 초반 크게 아픈 후, (2014년 만난 현 남편, 구 남자 친구 덕분에) 정기적으로 운동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새싹처럼 비실 거리던 내가 몸을 움직이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그냥 재미있었다. 의도적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면 뭔가 더 강해진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몸과 마음도 변화해 갔다. 병이 사라졌다. 콤플렉스가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1년에 병원을 몇 번씩 갔었는데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 과정을 지나면서 운동이라는 것이 점점 타인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되었다가, 직업을 위해서 의무감으로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가, 지금은 내 안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동기, 나 자신을 위한 물과 햇볕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뭐 안 하면 안 할 수야 있겠지만 식물이 햇볕과 물이 없으면 금방 쳐져버리지 않는가. 


이처럼 약 10년 간 내 안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내적 변화는 마치 아이를 키우듯이, 무언가를 긴 시간 동안 꾸준히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육아에 대해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직접 해본 사람만이 경험한 무언가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지식차원을 넘어선 부분이기 때문에, 아무도 앗아갈 수가 없는 나의 재산이다. 


나는 오랜 시간 무언가를 꾸준하게 하는 사람을 언제나 동경해 왔다.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더욱이 존경하고 동경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타인들을 부러워만 할 찰나, 내 안에서는 '나도 10년 간 꾸준하게 운동을 해왔는 걸?'하고 우기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에는 고집이 있다. 어쩌면 이 고집쟁이 덕에 새로운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내가 크게 무너지지 않고 꾸준히 페달을 밟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움직이지 않을 이유는 한 트럭을 얘기할 수 있지만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별로 안된다. 전자의 목소리에 한없이 빠져들면 빠져들 수가 있다. 그러면 당장은 편하지만 식물은 금세 축 쳐지고 만다. 


물론 잠시 멈춰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의 몸이란 너무 강하게만 단련해서도, 너무 방치해서도 안 되는 정교한 기계 같은 것이다. 아아- 삶이란 정말 끝없는 페달질! 어차피 이 페달질을 계속해야 한다면 조금은 편하게 하고 싶은데,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서는 종종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다. 대체 이 힘든 것을 왜 해야 하지? 아 하기 싫다- 하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일단 시작하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잡념 같은 것이 사라지고 개운해진다. 나는 개운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개 운, 운이 트이는 것, 새로운 운을 만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운이라는 거, 이렇게 내가 만들어갈 수 있잖아? 


그러한 부분에서 운동과 글쓰기는 정말 비슷한 점이 많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삶의 고통, 아픔, 즐거움, 고난들을 있는 그대로 자각해야 한다. 이것은 명상에서 말하는 마음 챙김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나의 주체성을 잡고 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최대의 효과를 보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잡념 같은 것이 사라지고 개운해진다. 대청소를 하고 난 후의 기분이랄까. 


또 이렇게 하다 보면 고통이 반드시 고통만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지한 채로 받아들이면서 할 일을 해 나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안도할 수 있는 구간이 나오고, 그 구간에서 뒤를 돌아보면 조금 더 단단하고 강해진 스스로를 발견한다. 


더 다행인건 나만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가 있는 한, 우리는 비슷한 것들을 겪어가고 있고, 그래서 더욱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정감이 든다. 고통이란 인류 경험의 보편성인 것이다. 다만 이를 내가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느냐가 인간 경험의 풍성함과 빈곤함의 차이를 만든다. 


그래서 그것을 잘 인지하고 캐치하면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꽤나 힘들다. 이미 개운하는 법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내 삶을 내가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출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