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회사 2년, 광고회사 1년, 영어강사 2년, 여성 웰니스 코치 2년, 작가, 심리/영성 코치 3년, 요가/명상 강사 5년.
20대는 그렇게 통째로 방황했다. 30대가 되면 그 방황이 끝날 줄 알았는 데 여전했다. 내가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정말 깊게는... 내가 정말로 재미있어하는 것은 빠져있었다.
나는 창조하고 싶은 예술가의 성향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언제부터 발견하게 되었을까. 정확히 말하면 약 3년 전부터 확실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맘때쯤 나는 '돈'이라는 주제를 붙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 해 가을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네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가 뭐야? 다들 돈돈 하니까, 나도 돈돈 해야 할 거 같은 거 말고. 정말로 이를 통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때 문득 “감각적인 삶을 원해”라는 답이 내 안에서 나왔는데,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은 꼭 돈이 많아서 즐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찾고 만들 수 있는 것이잖아!”
그것이 내가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정말로 얻고 싶은 삶이었다고? 그럼 그것이 뭔데?
그것은 내 감각을 깨우는 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고, 듣고, 햇빛을 쬐고, 비를 느끼고, 펑펑 울어내고, 깨끗하게 샤워 후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누군가의 가십대신, 내 마음의 얘기를 진솔하게 해 나아가는 것. 삶을 충만하게 사는 것. 삶 전체를 예술로 보고 그렇게 삶의 예술가로 살아가는 것.
그 시점 나는 다시 무언가 창조적인 활동을 해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은 커뮤니티 사업을 시작했고, 그림을 그렸고, 멈췄던 글을 혼자라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의 퀴퀴하고 서투른 그 모습들을 마구 종이에 펼쳐내기 시작했다. 나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며 흠칫 놀랄 때도 많았지만, 그렇게 나는 내 안의 생명력들을 다시 깨워가고 있었다.
내 안의 예술성을 다시 발견했을 때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 발견한 건 좋아! 그런데 어쩔 건데? 뭐 전업 작가 될 거야? 예술가 될 거야? 돈은? 뭐 이제 와서 어쩔 건데.”
내 안에서는 “다들 이렇게 살아. 그냥 원래 하던 거 해.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좋아하는 일이잖아.”라는 목소리와 “나는 예술가 성향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돈 벌고 싶어”라는 목소리가 싸웠다.
그 싸움은 꽤나 오래 지속됐고, 그 시간 안에서 나는 정말 많이 무너졌다. 나는 내 예술가 성향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서웠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이 둘을 합치려고 해 봐도 뚜렷한 답이 안 나왔다.
그러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요가강사 일도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 후련하기는 한데, 완전히 삶의 패배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나답게 살려고 노력했는 데 결국 여기구나. 눈물도 안 나올 만큼 가슴이 미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똑똑하고 문을 두드렸다. 4년 전, 에세이집을 출간한 곳에서 ‘창조를 위한 요가수업’을 해달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메시지를 받는 순간, 내 안에서 어떤 노랫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힘들었던 모든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며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어? 이렇게 연결될 수 있구나. 내가 해왔던 일들이 이렇게도 연결될 수가 있구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물꼬가 트듯, 멈춰있던 것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전 <창조를 위한 요가와 자유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첫 수업을 열었다. 창조성이라는 게 얼마나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는지 아는 나로서는 이 메시지에 확신이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혹시 나만 좋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수업에서 만난 분들이 본인을 넘어 타인과 깊게 연결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눈물로, 웃음으로 표현해 가시는 것을 보면서 내 안에 어떤 확신의 씨앗이 심어졌다.
그 이후, 새로운 수업도 세상에 선보였고, 여러 갈래로 졸졸 흐르던 물줄기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의 창조성을 깨우는 데 일조하고 싶다. 그러면서 내 작업도 해 나아가고 싶다. 이 창조성이란, 본인이 더 본인답게 살 수 있는 생명력과도 같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그 살아있는 감각. 어쩌면 나를 포함해 '돈돈' 외치며 계속 달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더욱더 진실한 욕구. 나를 표현하고, 이해하고, 이해받는 그 감각. 함께 기쁘고, 함께 슬프고, 함께 외로운 그 감각. 이를 하기 위해서 나는 그동안 그렇게나 많은 일들을 끊임없이 해왔던 것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한다.
물론 이러다가 막히는 구간이 당연히 올 것이다. 사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이 있으면 음이 있으니, 음의 기간에는 내 안에 침잠하여 퀴퀴한 것들을 마주하고 청소하는 일들을 해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와인이 발효되듯이 어떤 것들은 충분히 숙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흩어졌던 나라는 존재가 하나로 숙성될 것이다. 내 안의 여러 가지 자아들을 통합시키는 것이 삶이라면, 삶은 또 나를 위해 이렇게나 열심히 흘러가고 있다. 숙성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아프다. 삶의 통증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삶의 고통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했다. 이 말을 붙잡고 통증과 함께한다. 세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점점 커져가기를 바라면서.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자녀이다. 그래서 하나의 유일한 창조물인 '나'로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 시작은 내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을 잘 알아보는 것이고 나를 격려해 줄 타인들과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이후에는 세상과 연결되어 경제활동을 하며 '나'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꿈을 키워주고, 성장하고 격려하고, 서로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그런 장을 만들고 싶다. 나답게 살아가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과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