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브랜드에서 나를 표현하는 페르소나를 찾아본다면
흑백 화면 속, 매력적인 여성이 있다. 때는 그녀의 결혼식 날 D-Day. 식장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신부 대기실로 찾아와 부케를 건넨다. 마담, 당신의 꽃입니다. 여성은 대답한다. 마담 아니고, 아직 Miss에요. 신부는 계단을 걸어 내려와 아버지의 팔짱을 낀다. 둘은 버진 로드를 천천히 걸어간다. 그런데 신랑 옆에 선 순간, 신부는 뒤를 돌아본다. 멈칫거리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아버지에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미안해요 아빠. 그러자 흑백이었던 화면이 컬러로 바뀐다. 신부는 웨딩 슈즈를 벗더니 맨발로 결혼식장을 거꾸로 질주해 도망친다. 다시는 미스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을 되돌아간다. 그녀는 들고 있던 부케를 집어 던진다. 입고 있던 순백의 웨딩드레스까지 벗어 던지자 블랙 미니 드레스 차림이다. 바다 끝 절벽에 서서 위를 올려다본다. 그러자 영화처럼 헬기가 등장해 여성을 태워 날아간다. 헬기를 운전하고 있던 남성이 그녀에게 키스한다.
2년 후, 동일한 여성이 화면에 등장한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그렇다면 그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외친다. 그러더니 100m가 넘는 절벽 끝에서 푸른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카메라는 다시 실내를 향한다. 침대 속에서 여성이 사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며 연인을 터치한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는 말다툼을 했는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절망한 표정으로 그를 밀어낸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려는 듯 소리를 지른다. 사막으로 장면이 바뀐다. 동성 친구들과 함께 핑크색 오픈카를 타고 사막을 질주하며 자동차의 바퀴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린다. 장면이 교차되며 여성은 다시 남성에게 안긴다. 그의 손을 잡고 몸을 맡긴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핑크색 미니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해변가를 달린다. 이번에는 아까 그 사막이다. 자동차의 바퀴가 모래 위에 그린 그림, 자세히 보니 한 단어의 모습이다. love. 마침내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묻는다.
And you? What would you do for love?
당신은요?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위의 두 영상은 ‘미스 디올’(*Christian Dior의 대표적인 향수 브랜드)의 2015년, 2017년 광고이다.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며, 제도에 종속되지도 않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표현되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이자, 사랑을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사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저렇게 용감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탄하게 된다. 광고의 모델인 나탈리 포트만은 귀여우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덤으로 유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선명한 영상미까지 참 아름답다. 광고 업계에서 8년 동안 일한 내게 가장 좋아하는 광고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 시리즈를 답할 것이다.
향에 관심이 많다. 언급한 광고에서처럼, 수많은 뷰티 브랜드는 사람들이 동경할 만한 페르소나를 제품에 입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쓰는 향수는 그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모습, 혹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일부 반영하기도 할 것이다. 미스 디올 블루밍 부케의 향은 은은하면서도 우아하다. 베르가못과 로즈 에센스, 피오니 노트, 그리고 화이트 머스크 향이 어우러져 연인이 전하는 꽃다발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분 좋게 네 번 뿌린다. 양 손목에, 목의 왼쪽과 오른쪽에. 그리고 머리카락에도 살짝. 향이 퍼지는 순간, 상상 속에서 선물 받은 수 천 송이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흠뻑 취한다. 우아한 플로럴 향이 내게 그 하루 동안 말을 건네는 듯하다. 오늘도 후회 없이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겨울에 특히 손이 가는 향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커피 브레이크’다. FW시즌에는 플로럴 계열보다는 우드 계열을 선호하는데, 동일 브랜드의 명성 높은 ‘재즈 클럽’보다는 더 취향에 맞아 구입했다. 커피 브레이크는 탑노트는 커피 어코드, 미들노트는 라벤더, 베이스는 밀크무스 어코드, 샌달우드 에센스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커피 우유 같은 향이 난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모든 향수 패키지에는 그 향을 이미지화한 사진이 함께 있다. 커피 브레이크의 경우, 두 사람이 카페에 마주 앉아 있는 사진이다. 하얀 목폴라 스웨터를 입고 있는 여성은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고 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밖에서 방금 실내로 들어와 손을 녹이는 듯하다. 마주 앉은 남성의 손은 조금 더 넓은 초록색 머그잔을 들고 있는데, 잔이 큰 걸로 봐서 카푸치노가 담겨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우유거품의 느낌, 커피머신의 소리까지 감각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 겨울날 무릎에 담요를 두르고 게으른 고양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포근하다.
최근, 연남동에 자주 갔다. 서울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눈으로 걷다 보면 마침내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한다. 세렌디피티, 그 날의 우연한 축복이다. 카페에 머물며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 중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장들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
'너는 이 수첩을 열어볼 테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이 하늘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 안에 머무는 감동적이고 야생적이며 침범할 수 없는 한밤중의 하늘을. 이 푸른 페이지들 위에 담긴 별의 하얀 반짝임도 보게 될 것이다. 수많은 단어들이 네 두 눈의 아침에, 네 눈 아래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각 페이지에 쓰인 모든 단어들이 너에 관한 것임을.’*
이 세상에 문학과 예술이라는 불멸의 피난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게 언어의 마술을 가득 채운 채로 밖으로 나와 다시 천천히 걷는다. 소품을 판매하는 가게도 있고, 아기자기한 동네 책방도 보인다. 방금 전 취했던 문학의 여운을 깨뜨리지 않고 지속하기에 정말 알맞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곧 화사한 웃음으로 눈이 반달 모양이 된다. 인생을 예술가처럼, 세피아 빛 필름처럼 천천히 기록하며 살라고, 그날 아침에 뿌린 커피 향이 내게 말을 건넨다.
여름철에는 조말론의 ‘오렌지 블로썸’을 자주 뿌린다. 흰 붓꽃과 베티버의 따뜻한 향기가 오렌지 향과 함께 퍼지며 화사하고 상큼한 느낌을 준다. 이 향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떠오르게 한다. 지중해, 찬란한 태양, 과즙이 상큼하게 톡 퍼져 나오는 과일까지. 여름 원형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담은 영화였다. 오렌지 블로썸 향을 입은 채 밖으로 나가면 시트러스 류의 과실이 탐스럽게 열려 있는 나무 밑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것 같다. 한국보다는 더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유럽의 햇살. 날씨가 화창한 날의 스페인, 혹은 이탈리아 남부 정도가 떠오른다. 여름에 유럽에 가서 얇은 민소매를 입은 채로 오렌지 태양 아래 뛰어드는 걸 좋아한다. 눈을 감으면 검은 망막이 태양의 색으로 차오르는, 그 상상 속의 광합성만으로도 에너지가 충전된다. 좋은 일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억해내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권태로웠던 흑백의 일상이 컬러풀하게 전환된다.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다양한 향수를 구비해 놓고 그 날 아침 기분 내키는 대로 골라 쓴다. 선망하는 삶의 모습이 많다. 표현하고 싶은 내가 많다. 사랑하는 나도 좋고, 독립적인 나도 좋다. 에너지 넘치게 활달한 나도, 조용히 내면에 침잠하는 나도 좋다. 신록이 생명력을 발하는 한여름의 이미지도, 한겨울에 찾게 되는 묵직한 벽난로의 이미지도 좋다. 넓은 감각의 스펙트럼 속에서 디테일을 선명하게 구분해 내 스타일로 표현한다. 살아가고 싶은 향을 골라 피부에 입힌다.향으로 그 날 하루의 이미지를 열고,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뚜렷한 감각으로 새긴다.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1984Books
*인용한 광고 : Miss Dior, Blooming Bouquet 2015, The new Eau de Parfu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