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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May 01. 2024

Power of Hug

터치스크린 기능으로부터 만지고 싶은 나의 고양이를 떠올리다

한 여성이 소파에 기대 감자칩을 먹으며 손등으로 편안하게 노트북 화면을 터치한다. 터치스크린 기능으로 SNS상의 그림에 Like가 눌러진다. 도서관의 한 커플은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로는 노트북의 영상 재생 버튼을 누른다. 어떤 남성은 침대 위에서 잠든 여자친구를 대신해 손가락으로 조용히 화면을 터치해 영상을 정지시킨다. 방 안의 그물 침대에 포근하게 누워있는 다른 이는 터치스크린 기능을 활용해 그림을 그린다.


더 많은 것을 더 자유롭게.

POWER OF TOUCH.


손에 무언가를 들고 먹는 순간, 누워서 노트북을 보는 순간, 공공장소에서 키보드나 마우스의 소음을 조심해야 하는 순간 등, 노트북의 터치스크린 기능이 필요한 상황들을 디테일하게 그려낸 삼성 갤럭시 북4의 광고이다. 영상의 분위기가 따뜻하고 사랑스러워서 광고가 런칭된 연말 시즌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강조하려는 기술력을 ‘만지다Touch’라는 아날로그 감성으로 표현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쓰다듬을 수 있는 따스한 촉감의 존재들을 사랑한다. 종이 책, 필름 사진, 그리고 누군가와의 포옹.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 가족에게 선물처럼 나타난 한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2021년의 새해 첫 날, 우리 가족은 너에게 간택되었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필요하다는 말을 가슴 깊이 공감한 것인지, 나의 어머니는 우리 동네 모든 길고양이들을 10년 넘게 먹여 살리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시야에 잡힐 때마다 자기들의 엄마를 마주한 것처럼 저 멀리서부터 총총 걸음으로 달려오는 고양이들을 보면 기분이 이상하곤 했다. 그런 엄마는 고양이들을 사귀는 것으로 모자라, 어느 날 길고양이를 구조하는 분과도 친구가 되어 나타났다. 그 이후 종종 음모를 꾸미는 듯한 전화를 하셨는데, 몇 가지 인용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삼색이가 임신했나 봐요. 이렇게 추울 때 새끼 낳으면 어쩌죠. 이번 주에 잡아야 되나”

“사료 좀 배송해드렸습니다~ 16동하고 17동 아이들 잘 부탁드려요~”


그러다가 길고양이 보호소 주인은 아예 보호하고 있던 한 마리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몇 주 데리고 있어보면서 계속 키울지 말지 결정해도 된다면서. 사람들은 집을 보러 다닐 때 ‘이 집은 우리집 같아’ 느낌이 올 때가 있다고 하는데, 너도 그랬던 것 같다. 집안 곳곳에 배치된 고양이 피규어들과 고양이 친화적으로 보이는 우리 가족. 그래서 너는 우리를 집사로 간택했고, 짧은 시간 동안 매력을 발휘하려고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아직 아가라 한 주먹 크기밖에 되지 않았던 너는 수면 양말을 신고 있던 내 발바닥에 머리를 들이밀고 가르릉 가르릉거렸다. 그 소리가 매우 우렁차 사람의 귀에는 꼭 모터 소리처럼 들렸다. 유리구슬 같이 투명하고 초롱초롱한 초록색 눈동자에, 카페모카에 드리즐한 초콜릿 시럽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밤색의 줄무늬 고양이. 너는 귀여운 아기 호랑이 같았고, 나는 널 만난 즉시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너는 ‘호랭이’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보다도 네가 더 보고 싶어 본가에 자주 간다. 스킨십을 아주 좋아하는 너를 무릎에 안고 한참 동안 쓰다듬는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존재이다. 지금까지 봤던 모든 고양이들 중에서 가장 말랑말랑한 물성의 텍스쳐는 꼭 슬라임 같다. 주물럭 주물럭거리다 보면 또 다시 우렁찬 가르릉 소리가 나고, ASMR 같은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모든 잡념이 씻은듯이 사라진다. 그렇게 내 고민 위에 앉아 기꺼이 머리를 내어주는 너로 인해, 다정한 손길과 포옹의 치유력을 알게 된다. 폴짝 뛰어 방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너에게는 지구의 중력이 빗겨가는 것 같다. 사랑에 도취되어 공중을 유영하는 샤갈의 그림 속 연인처럼, 넌 내가 잃어버린 순수를 쫓는다. 현실에 안주하느라 땅에만 붙어있는 나는 그런 널 부러워한다. 어린 시절, 그 때 그 시절에만 우러나오는 천진난만함을 너는 평생동안 간직한다. 어린이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아마 그 사람들은 분명 순수했던 유년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어릴 때부터 고양이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강아지보다는 고양이에 조금 더 가까운 외모에, 성격까지 고양이과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었을까.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것처럼 보인다고들 하지만, 의외로 누군가에게 먼저 잘 다가가지 않고 내 시간, 내 공간을 필요로 한다. 고백하건대, 고양이 같다는 말이 곧 차가운 사람 같다는 말로 들려 마음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누군가를 가까이하기 전에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는 나와 달리, 너는 무조건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사랑한다. 엄마가 더 큰 화분으로 식물을 옮겨 분갈이를 할 때면 너 역시 앞발로 흙을 꾹꾹 밟고 식물이 자랄 바닥을 다져준다. 작고 여린 존재가 또 다시 작고 여린 존재를 사랑스럽게 돌본다. 사람들이 너를 기르듯이, 너도 무언가를 기르고 사랑을 듬뿍 주고 싶기 때문일까. 그런 널 보며, 고양이도 강아지 같은 따뜻함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울타리에 품는 사람의 수를 점점 줄인다. 그래서인지 네가 몸소 보여주는 커다란 환대는 인상적이다. 내가 그어 놓은 선을 너처럼 장난스럽게 침범해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너를 얼마나 닮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을까.


이제는 익숙해져서 감흥이 사라질 법도 한데, 아직도 네 장난기 많은 몸짓에 마음을 빼앗긴다. 네 걸음걸이는 사뿐사뿐 아장아장이 아니라, 우당탕탕에 더 가깝다. 공을 던지면 달려가서 물어오는 비글 같은 고양이. 사람의 등에 점프해 어부바를 해달라고 조르는 고양이. 누워있으면 쫄래쫄래 어딘가에서 나타나 내 다리에 발을 턱턱 포개 나를 베고 함께 눕는 고양이. 너는 악동 시절의 활동량 넘쳤던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안심이다. 딸들이 모두 독립을 한 우리 부모님께 너라는 존재를 안겨드렸으니. 너는 거실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상쾌한 신록, 새들의 노랫소리, 여명과 노을, 눈이 소복이 내리는 모습까지. 매일을 처음 살아가는 것처럼, 무언가가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눌러앉아 현재를 실컷 누린다. 네 눈높이에서 그 시선을 카메라에 가득 담아 유튜브 채널로 기록했다. 대충 만든 영상들이었지만, 시선을 끄는 제목을 붙였더니 어느덧 영상 당 조회수가 3천회를 넘었다. 그러자 광고가 붙었고, 어느 날 해외의 해커한테 넘어가버렸다. 아기 시절의 네 모습을 남긴 데에 의의를 두고 그냥 그대로 놔뒀다.


사실 호랭이라는 이름을 너무 대충 지은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너의 전임자도 ‘야옹이’였다. 까맣고 하얀 젖소 무늬의 몸통에, 쾌걸 조로처럼 까만 마스크를 뒤집어 씌워 놓은 것 같은 얼굴.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데려온 그 애는 우리 가족과 18년을 함께 살았다. 세월을 빗겨갈 수 없었던 터인지, 말년에 신장에 문제가 생겼고, 마지막에는 눈까지 멀어버렸다. 몇 년 동안 매일 아침 그에게 수액을 주사해 생명을 연장시켰던 우리 가족은 결국 그를 보내줬다. 동물병원에 가서 야옹이를 안락사시킨 그 날, 온 가족이 잠을 못 자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즈음 나는 허전함을 달래려고 고양이 카페에 자주 가서 다른 고양이들을 안고 있었다. 언니는 펫 로스 우울증이 심하게 왔고, 다시는 다른 고양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엄마는 연필로 직접 그린 흑백 초상화를 벽에 걸었고, 아빠는 호랭이 너를 보면서도 야옹이를 떠올렸다. 나의 10대와 20대를 모두 지켜봤던 존재. 누군가가 울고 있으면 다가가 조용히 곁을 지키며 위로를 건넸던 아이.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한 또 하나의 가족. 우리가 너무 슬퍼할 것을 알기에 18년을 함께 살면서 쉽게 떠나지 못했던 걸까. 그 애가 너무 아파하는데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네 얼굴은 그런 슬픈 기억 어딘가를 건드린다. 사람과 동물의 시간은 다르게 가고, 언젠가는 우가 이별해야 할 것을 알기에, 가끔은 너를 보고 있어도 네가 그립다. 혹자는 반려동물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게 슬프고 겁나서 키우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은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에게 더 잘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사람은 사랑할 존재 없이 살 수 없다는 에밀 아자르의 말을 떠올린다. 참 이상하다. 우리들은 누군가가 떠나면 다른 존재로 빈 자리를 채우고, 떠난 존재를 완전히 잊지는 못하더라도 슬픔은 조금씩 극복한다. 언젠가 네가 떠나면 남아있는 사진과 영상들이 우리를 위로하고, 네가 그래왔던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넬 것을 생각한다. 평생에 걸쳐 그리움을 살아낸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서로가 자라는 걸 지켜봐 주는 게 얼마나 빛나는 일인지 되새겨 그 추억으로부터 힘을 얻는 게 아닐까. 그건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낼 작지만 가장 큰 순간들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하는 존재가 마음 가득 반겨줄 거라는 기대와 네가 나에게로 우당탕탕 달려오는 모습을 떠올리는 상상들은.



*인용한 광고 : 삼성전자, 갤럭시 북4 <Power of Touch> 프리 런칭 편 Full Version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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