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사라진 수많은 ‘마녀’들에 대하여, 김영찬
(본 글은 <델마>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델마>는 2018년 개봉한 영화들 중에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북유럽 영화의 차가운 정서와 철학적인 주제가 돋보입니다. 저는 <델마>라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영화의 주제 의식과 영화의 촬영방식과 구성, 소리의 사용방식과 새로운 빛의 사용방식 등 영화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지점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은 영화를 보신 분들과 이야기 해보고 싶은 몇몇 부분들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매부리코에 험상궂은 표정과 빗자루를 타고 까마귀를 몰고 다니는 등 고정적인 표상들이 나타납니다. 마법을 부릴 줄 안다는 것은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이고 이는 미지의 존재라는 의미기도 합니다. 인간은 ‘알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얼마나 큰지 모르기 때문에 우주를 무서워하고, 자연이 언제 변덕을 부릴 줄 몰라 두려워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입니다. 존재나 믿음의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신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과학적 이성은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반면 종교적 관점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 즉 미지의 일들이 바로 신께서 하신 일들이기에 우리는 신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델마>에서 마녀가 다루어지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델마의 부모에게 명확한 것은 델마가 원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현상뿐입니다. 그러나 델마가 이를 행하는 방식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마녀를 일반인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은 단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질병 때문이라는 과학적 소견과 함께 약물로써 생각하는 힘 자체를 제거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라는 절대자의 힘에 기대어 사고를 제한하는 방식입니다. 델마의 할머니는 전자의 방식으로 다루어져 델마도 모른 채 요양병원에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후자의 방식을 적용했던 델마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낀 아버지는 결국 확실한 방법으로 델마를 억압하려 합니다.
중세시대는 흔히 암흑의 시대로 대표됩니다. 철학적으로 아직 인간의 지성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을 신에게 기대어 이해하던 시대.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교황청의 독선 등 그 흔적을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 ‘비이성적 행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마녀재판일 것입니다. 마녀재판은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을에 어떤 여성이 마녀라고 낙인찍히면 사람들은 그를 화형대에 올려 불을 붙이거나 발에 무거운 돌을 묶어 강에 빠뜨립니다. 그 속에서 살아나면 그는 마녀인 것이고, 아니면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이 마녀재판입니다. 지독하게 길었던 중세시대에 수 많은 여성들은 무고하게 죽음에 내몰렸습니다. 이 비상식적인 행위는 중세에서 끝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델마와 델마의 할머니는 의학적으로 ‘심인성 뇌전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정신적,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뇌전증으로 인한 발작 증세를 일으킬 수 있는 병입니다. 영화 속에서 델마가 이 질병에 대해 검색하는 장면에서는 역사 속 여성들이 심인성 뇌전증을 일으켰던 그림들이 등장합니다. 이 그림들은 중세의 마녀재판과 연관될 수 있는 이미지들입니다. 영화는 역사 속의 ‘마녀’에 대한 전제 자체를 뒤집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델마와 그의 할머니는 실제로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 속에는 실제로 마녀들이 존재했다는 가정에서부터 <델마>의 내러티브는 힘을 얻습니다.
영화의 결말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다들 보셔서 아시다시피, 델마의 아버지는 더 이상 델마를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를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를 눈치챈 델마는 초능력을 발휘합니다. 호수의 한 가운데 배를 타고 있던 아버지의 손에서부터 불이 타오릅니다. 이 불은 물에 빠졌다고 해서 완전히 꺼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죽음으로만 끝낼 수 있는 고통입니다. 수많은 마녀들이 죽임 당했던 방식으로 델마는 자신을 억압한 아버지에 대해 복수합니다. 이 복수는 그동안 자신을 구속했던 아버지에 대한 전복이자 오랜 역사동안 마녀들을 억압했던 남성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오프닝(타이틀이 올라온 뒤의)과 엔딩은 수미상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광장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줌인 되며 주인공을 제시하고, 엔딩에서는 델마와 아냐의 투숏에서부터 천천히 줌아웃되며 다시 넓은 광장을 보여줍니다. 저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유럽 영화에서 광장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2017년 칸에서 대상을 받았던 루벤 외스틀룬트 감독의 <더 스퀘어>의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저는 <더 스퀘어>가 “유명한 관광지와 광장이 테러의 공포에 둘러 쌓여있는 시점에서 편견은 제거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 광장에 대한 담론이 변화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광장은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며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고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델마>는 <더 스퀘어>처럼 변화하는 광장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광장에서 시작해서 광장에서 끝나는 이 형식은 주목할 만 합니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는 델마가 단순한 초능력을 넘어 절대자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살 시도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었던 델마의 어머니가 델마의 손짓과 함께 다시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는 장면과 겹쳐지며 도대체 델마는 어떤 인물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델마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많은 마녀들과 다르게 힘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 호수에 들어가 사라진 아냐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델마는 그 순간 입에서 까마귀를 토해냅니다. 델마가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나타났던 까마귀를 밀어냄으로써 그는 통제되지 않는 힘에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델마의 할머니가 당신께서 남편을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한 것과 대조되며 델마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냐를 살려냅니다.
만약 델마의 능력이 통제 불가능한 채로 광장에 내던져졌다면 저 또한 불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사용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웅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선함을 위해 이용하듯, 델마 또한 그럴 것입니다.
저는 델마의 결말을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영화의 판타지성을 상징적으로 생각한다면, 델마의 초능력은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여성의 능력으로 그간 사회에 의해 억압받던 여성의 해방과 광장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들은 델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또는 광장에서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델마와 아냐를 통해 델마 또한 앞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방향에서든 영화에서 광장과 그 속의 델마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종교적 가치를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일치한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점차 다양화되고 있고 종교적 가치와 충돌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영화 속 델마는 자신이 아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때, 신에게 기도를 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친구들과 대마초(라고 속인 걸 모른 채)를 했을 때 델마의 몸을 뱀이 휘감는 상징적 장면이 나오는 것도 자신의 종교적 가치와 반하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델마는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가치가 인류의 절반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억압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를 언제나 그래왔듯 교조적으로 추구해야 하는가. <델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희생되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죄하는 동시에 델마를 오롯이 해방시키며 새로운 가치를 광장 속에 당당히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