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몸통의 반이 부서져 폐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기수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밤잠까지 내쫓으며 머리에 꽉 들어찬 '존재'를 어떻게 쉽게 보낼 수 있겠냐는 말이다. (p71)
떨린다. 행복에 휩싸인 연재의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연재는 살아 있었다. 늘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무엇이 연재를 이토록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일까. 투데이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저 작은 화면에 기계를 구상하고 있을 뿐인데.
"투데이가 뛸 때와 같아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어요. 투데이가 뛸 때처럼 당신도요."
"네가 행복이 뭔지 알기나 하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예요. 살아 있다는 건 호흡을 한다는 건데, 호흡은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진동이 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저는 호흡을 못 하지만 간접적으로 느껴요. 옆에 있는 당신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p301)
#1.
'무언가'에 진심인 사람은 행복하다.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와 나. 그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온전히 집중하며 행복을 느낀다. 천선란 작가님의 <천 개의 파랑>의 주인공인 연재는 말을 타다 낙마하여 폐기되기 직전이었던 기수 로봇 '콜리'를 집에 들여 정성스럽게 개조한다. 콜리는 소프트웨어 오류로 다른 기수 로봇들과는 다르게 인지와 학습 능력을 가지게 된 '특별한' 로봇이다. 개조 과정에서 필요한 부품들은 학교 친구인 지수에게 조달받는다. 함께 고등학생 로봇 모델링 대회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2.
지수는 행복했을까? 연재와 함께 대회에 참여하고자 한 것이 정말 대입만을 위해서였을까? 지수가 진심을 다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대회 입상? 대입? 혹시 연재 그 자체였던 것은 아닐까? 그랬기 때문에 연재에게 섭섭함도 느끼고, 상처도 받았을 것이다. 만약 대회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상처 따위는 받지 않았을 것을.
지수가 화난 이유는 간결했다. 하지만 간단하지는 않았다.
"내가 너를 친하게 생각하듯이 너도 나를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p325)
#3.
진심인 대상이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가 되는 순간, 삶은 불행해진다. 상처받는다.
#4.
아주아주 오랜만에 마음을 줬다. 인간관계에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그 불쾌한 갑을관계에서, 나는 거의 항상 갑이었다.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나 하나면 되는 사람,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사람 인]은 두 인간이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필요 없고 [(丨)뚫을 곤]처럼 그냥 혼자 꼿꼿이 대지를 뚫고 박혀 있는 사람.
중학교 때부터 나는 '연재'에 가까웠다. 독서, 농구, 축구 게임, 격투 게임, 코인 노래방,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도 많고 친구도 두루 사귀었지만 좀처럼 절친이라고는 없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둘이 있으면 불편한, 친구. 고등학교에 가서는 수능이라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더더욱 관계에 거칠어졌다. '인간관계'에 '효율성'이라는 개념을 접목시켰을 때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대학에 가서는 서서히 '지수'에 가까워졌다. 그곳은 파라다이스였다. 나와 비슷한 학창 시절을 보낸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었다. 그렇게 관계에 연연하게 되는 순간 나는, 을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서로에 대한 호감의 차이에 따른 관심의 구배, 그에 따른 갑을관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그저 갓 청년이 된, 사회성이 부족한 샌님의 자기혐오였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관계에 연연할 때, 나는, 우리는 상처받는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사회화되며 꾸준히 유지 혹은 다짐해 온 것은 관계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상처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관계'에 연연하다니, 그것 참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인생은 흘러, 지금 내가 일하는 이곳은 또 하나의 파라다이스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일하는 곳. 고개만 들면 배우고 싶은 것이 눈에 보이는 곳. 이곳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마음을 줬다. 관계에 연연했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상처받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버린 상처받는 기분. 이 느낌이 싫어서 '친절한 히키코모리'가 되기로 결심했었는데.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진 것은, 상처 속에서도 타인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계에 연연하지 않은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일까. '로봇'에 몰두했던 연재는, '연재'에게 집중했던 지수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진심을 다해 몰두하는 대상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진심은 '누군가'를 향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향해야 한다. 하지만 40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지금, 나는 안다. 사람의 마음이란 교묘해서,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자꾸만 상처받는 방향으로 기울고, 또 제멋대로 줘버리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