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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서연 Jan 12. 2019

4. 안토니오의 러브스토리

보통의 사랑이죠

내가 스페인에서 살 때 같은 집에 살던 안토니오는 게이였다. 잘생긴 얼굴에 혹해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처음에는 서로 대화도 없고 사이도 그닥 좋지 않았다. 얼굴값하는, 싸가지없는 애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오해인걸 알았다. 알고보니 싸가지가 없는게 아니라 개념이 없는 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정중하게 스카이프가 깔려있다면 노트북을 빌려줄 수 있냐고 묻더라. 스카이프는 없지만 원한다면 설치해도 좋다고 하니 연신 고맙다고 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공손한 모습에 내심 놀랐지만 중요한 사람과 연락하나보다, 했다. 여자친구인가. 얼핏 들리는 목소리가 남자라 그냥 친한친구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조별과제 때문에 빡치는 날이면 밤에 나가 로마교주위를 뛰었다. 그 날도 채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안토니오도 조깅하러 나간다길래 같이 산책을 했다. 로마교의 밤은 속마음을 끌어내는 힘이 있는지 아니면 자신 앞의 이 한국여자애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새어나가지 않을 것같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토니오는 그 날 자신이 게이라며 본인의 러브스토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안토니오의 남자친구는 나도 몇 번 본 사람이었다. 이전에 스페인 북쪽 마을 레온에서 온 친구라며 소개시켜 준 적이있었다. 내가 '아 그때 걔?"라며 아는 체를 하자 들뜬 표정으로 잘생기지 않았냐고 묻더니 또 금세 자신은 지금 첫사랑 중이라며, 그런데 장거리 연애라 힘들다며 풀죽은 표정이 되었다. 보통의 연애였다.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는, 이미 몇 번이나 어디서 들어본 것처럼 뻔하고 진부한 그런 연애이다. 게이, 동성애 따위의 단어들로 전부를 퉁 쳐버리기에는 너무도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모임이었다.

다시 돌아온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마드리드 월드프라이드가 한창이었다. 스페인은 이미 동성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퀴어 축제가 축제인 동시에 존재를 증명해 보이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이 곳은 정말 말 그대로 모두의 축제였다. 관공서나 박물관, 크고 작은 가게들마다 무지개 깃발이 걸어 놓았다. 메인 광장뿐만아니라 도시의 곳곳에 무대가 설치되고 행사가 끊이질 않았다. 성소수자들의 축제였지만, 모두의 축제였다.
어디선가 '모두가 다르면 결국엔 다 똑같은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 달라서 결국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 그렇게 첫사랑에 죽느니 사느니하던 안토니오는 현재, 레온에 살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같은 도시에 사는 새로운 남친을 사귀는 중이다. 이 또한 보통의 연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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