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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Nov 11. 2023

친구가 없어서

“이번 주 금요일에 뭐 해? 아는 친구가 파티를 연다는데 같이 갈래?”


나는 가지 않았다.


“잠깐 통화하실래요?”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 달에 애들끼리 오랜만에 모이기로 했다. 너도 올 거지?”


나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디제잉을 배운 뒤 내게 음악을 틀게 해줄 만한 곳들을 찾아다녔다. 만일 친구의 친구가 주최했다는 파티에 나갔다면 디제잉과 관련된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테고 일자리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와 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화를 했다면 우리는 한층 더 가까워졌을 테고 그녀의 관심은 내게로 향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을 만났다면 그동안의 고충을 토로하며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밤새 배가 아프도록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부터 모든 자리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굶주린 개구리는 겨울을 만났다. 동면에 들기 전 배를 가득 불리지 못했다. 어쨌든 동면에는 들어야 한다. 눈앞의 겨울을 버텨내고 봄이 오면 분명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봄이라는 것이 오긴 오는 것이었던가? 지구는 돌고, 봄은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 해도 개구리에게 봄이 와 닿을 수 있을까. 배를 곯은 개구리가 겨울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켜야 할 것도, 좋아하는 것도, 꿈도, 목표도,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개구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면 죽자. 라고 하기엔 살고 싶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자살뿐’이라던 프랑스 철학가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정하고 무의미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죽음이 아닌 영생을 바랄 수밖에 없지 않나. 속절없이 흘러간 과거를 제한 없는 미래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꼬장꼬장한 완벽주의에 젖어있다. 이토록 게으른 사람에겐 최악의 결과를 낼 수 있는 성향이다. 강렬한 태세로 자신의 목표를 이뤄내는 사람들에게 완벽주의가 가미되면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들은 정반대다. 눈앞에 놓인 일을 대충 훑어본 뒤 완벽하게 끝낼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한 판단이 들어 일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길의 중턱에서 ’완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모든 게 따분해지고 싫증 나며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 내팽개쳐 버린 채 터덜터덜 길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태도는 독이라는 것을 안다. 끝까지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보던 영화를 꺼버리고, 작가가 전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책을 덮어버린다. 상대가 내게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으니 인연을 끊어버리고, 우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지 않는다.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며? 재밌게 살고 싶다며? 끝내주는 사랑을 하고 싶다며? 너무나 멀고 먼 도착지만을 바라보다 보니 시작부터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오늘을 버틸 벌레를 잡아먹었다면 그만이었을 개구리는 몇 달 뒤의 동면을 완벽하게 버티게 해줄 벌레를 찾고 찾다가 그 어떤 벌레도 입에 넣지 못한 것이다.


나는 젊음이라는 것을, 멋짐이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것을, 행복이라는 것을 너무나 높고 먼 목적지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눈앞의 벌레를 잡아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제도, 오늘도, 지금도 먹고 싶고, 내일도 먹고 싶을, 그리고 먹을 수 있는, 눈 앞의 작은 벌레는 떠드는 것이다. 종알종알 떠들어대며 누군가에게 생각을 전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친구가 없는 나는 이제 떠들어대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도 종알종알 눈 앞의 벌레를 먹고 봄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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