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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희 Mar 09. 2023

창희

5:51am

유기묘가 회사에 있었다. 그걸 완전히 잊은 채 모두가 주말을 보내고 온 사이 삐쩍 말라있었다. 언른 물을 주고는 한 생명을 케어한다는 게 이렇게나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구나 싶어 꿈인데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 고양이는 어린 소년으로 변해있었고 알고보니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며칠을 마이쮸로 버티고 있었다. 회사 일은 해야하니 잠시 일을 하고는 점심 시간에 먹을 것을 사다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은 창희였다. 내 이름과 비슷해 왠지모르게 더 마음이 갔다. 아이는 어떻게 데리고 있어야하나 무엇을 먹여야하나 이리저리 서툴렀다. 식사 시간이 되자 음식포장을 부탁한 사람들은 금세 잊고 가버렸고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야하나 고민했다. 그러기에 밖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간은 가고있고 나는 자꾸만 잠이 왔다. 잠으로 피하고 있었다.


사람이든 고양이든 어딘가에 버려지는 이들이 있다. 버려진 길에서 나고 산다. 오래 전에 <꿈의 제인>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가출청소년의 세계를 그린 영화인데 엄마아빠한테 혼나 집을 나오거나 집에서 쫓겨나고는 얼마 안있어 다시 들어가 싹싹 빌거나 부둥켜 안고는 화해하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내 친구들과 미디어에서는 그렇게 비쳐졌는데, 영화에서 그린 가출청소년들은 완전히 버려진 아이들 같았다. 버려진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아이들 같았다. 그 세계는 그들만의 언어로 이루어져있었다. 일반적인 가족형태가 아님에도 자신들을 ‘팸’이라 불렀고, 부모와 자식같은 위계가 존재했다. 같은 나잇대여도 아이들을 들여온 팸의 리더를 아빠라는 언어로 통일되어 불려졌다. 위태롭고 은밀한 세계였다. 너무 은밀해서 아무도 모르게 팸들의 세계가 돌아간다. 그건 그들이 잘 숨겨셔일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서일까. 영화 <아무도 모른다> 역시 버려진 남매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꿈에 나온 창희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매 끼니를 라면을 사먹고, 또는 훔쳐 온 라면을 먹고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초등학생 정도의 맏형이 아주 어린 동생들까지 챙겨야하는데 빨래도 해야하고 밥도 구해야 하고 집은 엉망인데 여름의 해는 쨍쨍하다. 땀을 닦는 일이 식은땀일지 눈물일지 모를 정도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이 영화들을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꿈에서 나는 창희를 계속해서 데리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나는 결혼도 안했고 나 혼자 살기도 벅찬데 창희까지 내 삶에 들여올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자꾸만 피하고 싶어서 꿈 속인데도 자꾸만 잠의 구렁텅이로 들어갔다.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다. 그렇지만 없던 일로 하기엔 창희에게 줄 마이쮸를 너무 많이 챙겼다.



2023년 3월 9일 목요일


창희, 5:51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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