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pm
꿈을 연거푸 꿨다. 꿈을 꾸고싶어 잠을 계속 자게 됐달까.. 꿈 속에선 요조님이 막장드라마 같은 소설책을 쓰셨고 나는 내가 그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이 되어 이야기 속을 거닐었다. 대부분 잘 기억은 안나는데 소설의 마지막을 찾아가는 길에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꿈속에서 엉엉 울었다. ‘찾아가는 길’이라고 쓴 이유는 소설의 배경이 글이 아닌 이미지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이야기 속 길을 걸었다. 동시에 글을 계속 읽기도 했는데 직접적으로 결말을 써놓지 않아 계속계속 읽어야지만 주인공들이 어떻게 된건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말을 믿을 수 없어 반복해서 읽기도 했다. 읽으며 울었다.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였다. 요조님이 그런 소설을 쓰신다는 게 조금 귀여워서 깨고나서는 웃었다. 그렇지만 결말을 직접적으로 내비치지 않는다는 게 왠지 요조님스럽다고 생각했다.
‘결말’이라는 건 오직 이야기에만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우리 생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우리의 죽음은 또다른 이야기들을 언제나 파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런지 죽음이 그렇게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결말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더 선호하는데 그건 우리 삶의 결말보다도 흘러감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결말을 향해 가는 이야기에는 이야기를 끝맺는다의 의미보다도 ‘더이상의 이야기는 없음’으로 닫아버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대화가 갑자기 중단되는 것처럼 우리는 그 결말에 더이상 할 말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린 결말’은 어떠한가? 열린 결말은 ‘결말’이 아닌 것 같다. 열려있기에 이야기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끝맺지 않음으로써 또다른 이야기들을 파생시킬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야기에도 나는 끝맺지 못하는 버릇같은 게 있다. 끝맺음은 단정지음과 같기도 할텐데, 그렇게 결말을 만들어버리면 더이상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 한동안 결말을 찾으려 했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그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했고 그 말에 나도 유일하게 끄덕이며 살아왔는데, 언제부턴가 질문에 끝을 맺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질문만 하며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에는 “그냥 태어났으니 산다”라는 결말도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라는 행복이라는 결말도 있고, 꽤나 종교적인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결말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나에게는 더 재밌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어떤 이야기에도 결말을 부여하지 않은 채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의 파생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싶다.
오늘의 꿈엔 ‘비극’이라는 결말이 있었지만, 또다르게 생각하면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닫힌 결말’에 스스로 닫히지 않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꿈 이야기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내일은 새로운 꿈을 꿔보길 바라본다.
2023년 2월 5일 일요일
이야기는 계속된다, 12:02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