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자와 연애를 마무리하며
2년 전, 회피형 그 남자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절친한 친구의 소개였고. 소개팅한 날 나는 첫눈에 그에게 반했다. 네 번의 만남 끝에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러 다니던 테니스를 1년간 접어두고 졸졸 그를 따라 여행을 다닐 정도로 회피형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되는대로 휩쓸리듯 살아온 나에게, 목표 지향적인 회피형 남친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라면 내 인생이 조금 더 풍요로워 질 것만 같았다.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나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내가 많이 희생하더라도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를 졸라 남자의 어머니를 만나뵈었고, 우리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여러번 서로의 집안에 왕래하면서도 막상 우리 사이에 결혼에 대한 대화는 0.1만큼도 없었다. 답답해 하던 나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준 친구가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남자가 프로포즈를 준비하고 있다고 언지를 줬다.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프로포즈를 기다렸다. 한달 두달 여섯달이 지나도록 내가 바라고 그리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왜 나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결혼이라는 문제가 자기도 태어나 처음 겪는 문제라서 너무 어렵다고 했다. 결혼이라는 게 가볍지 않은 문제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몇 달의 시간을 더 기다렸다. 내가 기다려주는 만큼 그도 언젠가 답을 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기다리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결혼을 주제로 농담 따먹기나 해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메신저로 그에게 나를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는 내 질문에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잠수를 탔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이제와 뒤돌아 보면 사귀는 동안 그가 회피형 남자라는 단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통화를 했지만, 우리에 대한 대화는 단 한 마디도 없었고, 늘상 자기 일과 회사 이야기 뿐이었다.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인색했다. 우리는 좀처럼 싸운 적이 없었는데, 가끔 쌓인 감정을 내가 표현할 때 그는 그저 상황을 무마하려고만 했지 내 감정에 공감해주지 못했다. 내가 화난 포인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한참을 다그쳐야만 자기 생각을 말하기 일쑤였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애써 단점을 모른 척 했다.
사귈 때 모두가 별로라고 말하던 남자친구인데, 나는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었던 남자친구였기 때문에 잠수 이별을 당하고 나서 인지 부조화가 왔던 것 같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애써서 붙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허탈했다. 내 판단이 틀렸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한참 동안 이별을 숨겼고, 혼자서 묵묵히 이별을 극복했다. 멘탈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몇 가지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1. 잠수 이별에 마침표를 찍어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완된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잠수 이별이 힘든 이유는 미완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주간 연락이 없던 그에게 마침표를 찍는 카톡을 날렸다. 내가 기다려준만큼 너도 언젠가 나에게 답변을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잠수이별이라니! 너무나도 실망스럽다. 이번에도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내 탓이나 상황 탓 하겠지만, 다 네 탓이고 다음번 연애에는 더 어른스럽게 예의있게 행동하라고.
2. 책의 도움을 받았다.
잠수이별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회피형 애착 유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회피형 애착 유형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 오카다 다카시의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라는 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회피형 남자의 선택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나를 떠나서가 아닌 중요한 문제에 대한 도피 성향으로 잠수 이별이 발동되었다고 자기 위로 할 수 있었다.
3. TO DO LIST 작성
혼자가 되었을 때 하면 좋은 TO DO LIST를 작성했다. 운동하기, 살빼기도 물론 좋지만 조금 더 흥미롭고 달성하고 싶은 주제들(ex. 남사친 사귀기,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남자친구가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작성했다. TO DO LIST를 실행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다 보니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한 생각은 저절로 줄어 들었던 것 같다.
결혼하지 않고 도망가주어 고마워.
나는 서른 여덟살에 잠수 이별을 선택한 그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다. 서른 두살에 찾아온 이별은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회피형 그 남자를 사귀면서 내면의 성장이 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이렇게 참고 노력한 적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