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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민아 Aug 02. 2020

형제



지난 연말 연초에 두 오빠의 부음을 받았다. 


어이없게도 8일 간격으로 오빠 두 분이 나의 곁을 떠난 것이다. 너무도 황당한 충격에 슬픔보다는 깊은 시름에 빠지면서 세월 속에 배인 오빠들과의 추억이 아프게 젖어온다.     


보통 한가정에는 네다섯 형제가 기본이었던 옛 시절, 우리 집은 아들 셋 딸 여섯 9남매의 대가족 구성이었다. 그 시대는 모든 집안이 아들만을 선호했던 터라 남자 형제가 적었던 우리 집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항상 세 오빠만을 위해 주셨다. 무엇이든 좋은 일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오빠들 몫이었다. 아들에게는 꾸중보다는 칭찬을 해주는 때가 많아 우리 여자 자매들은 수군수군 불평을 늘어놓았었다. 그렇게 떠받들며 귀한 대접을 받고 자라서인지 세분 오빠들은 대체적으로 평탄한 인생을 살아오셨다.      


평생 성실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올곧게 살아오신 큰 오빠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신 분이시다. 맨 앞 서열인 오빠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학업을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탄탄하게 기반을 잡아 일가를 이루셨고, 밑으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위해서도 책임을 다하며 맏이 노릇을 철저히 하셨다 그분의 모습은 온 가정을 이끌던 아버지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 있었다. 존경받는 품성으로 늘 노력하면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지키는 맏형의 자리.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생들을  보살펴주셨기에 우리 아우들은 그 고마움을 익히 느끼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네 남매의 자녀 또한 훌륭하게 키워서 각자 사회에 명성을 얻고 있으니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이기도 하셨다.  

    

두 분이 세상 떠나시기 얼마 전, 우리 세 자매는 오랜만에 서울 외곽에 계시는 큰 오빠 댁을 방문했다. 그날 칠십 중반을 넘긴 흰머리 성성한 오라버니의 눈에서 그렁이는 눈물을 보았다. 형제자매 가족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부모 대신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부담으로 고달파도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동생들을 감싸주셨던 큰오빠. 그중에도 남다르게 각별한 신경을 쓰면서 여겨주시던 아우는 셋째 오빠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동생을 부모처럼 삶의 뒤편에서 물심양면 정성껏 돌보아 주셨다. 문학박사이며 모 대학 교수이신 그분도 끊임없이 살펴주고 챙기시는 형의 배려에 늘 고마워하며 자주 찾아뵙고 대화도 길게 나누곤 했다. 누가 보아도 의좋은 형제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요 몇 달 사이 어떤 사소한 오해가 있었는지 소식이 뜸하다고 했다. 서운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면서도 궁금해하시던 차, 우리 여자 동생을 보자마자 셋째 오빠의 안부를 물으시던 도중 눈을 꿈뻑꿈뻑하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시는 것이었다.     

 

요즈음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병원을 자주 내왕하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쇠약해진 상태라 상실감이 크셨던 것 같다. 형제간에 자주 만나서 정을 쌓으면서 우애도 돈독하게 나누고 싶은데 한동안 동생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내심 괴로워하셨던 것 같다. 소통도 안되고 보고 싶은 마음 또한 누를 길 없어 그리 노여워하면서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큰 오빠께서는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아우들에게 한껏 사랑을 내리고 싶었는데 그 깊은 정을 더 많이 주지 못한 미안함이 그런 눈물을 만들었나 보다. 못다 한 아쉬움으로 가슴 저려하는 맡형의 회환 앞에서 우리 여형제 또한 그 곁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고개 숙이고 있었다.    

  

지금은 일본에서 잘 살고 있는 막내 여동생이 대학 다닐 때 길에서 우연히 오빠를 만났었다고 한다. 그때 동생이 입고 있던 옷이 초라해 보였는데도 옷 한 벌 사 입으라고 용돈을 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사십 년이 넘은 그 일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미안해하고 계시는 우리 큰 오빠. 형이라는 무거운 책임 의식에 소임을 다 했으면서도 아직도 형제에게 자애 정신을 양껏 발휘하지 못해 그리 서러워 우셨던 걸까. 지금은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계시지만 여전히 노심초사 동생들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것만 같다.   

     

몇 년 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그분의 회고록에 한 몸으로 받았던 형님의 사랑을 글로 남기셨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던 형님. 어머니 다음으로 자신을 몸처럼 사랑해 주시던 분.  마음에 가장 큰 빈자리를 남겨두고 가신 형님. “김동한 신부 형님은 진정한 열매를 맺은 사랑의 밀알 하나가 되셨노라.” 하시며 형님의 큰 사랑 앞에 고개 숙이면서 영적으로는 지금 형님과 함께 더 가까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 장남 아들이 한 살 터울 동생을 감싸 안으며 애틋하게 살펴주는 모습을 보면서 형으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의연한 자세에 감탄할 때가 있으니, 원래 맏형이란 피의 원천에서부터 샘솟는 사명감을 안고 태어나는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저 세상에 계신 두 오빠, 추기경님 형제, 그리고 우리 두 아들을 생각하며, ‘형만 한 아우 없다’라는 격언에 담긴 깊은 뜻을 새삼 다시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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