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입니다
뉴진스가 드디어 라이브를 켜고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쌓인 게 많았으면 참다 참다
각오하고 이런 방송까지 하게 되었을까. 라이브 방송을 다시 보기 하면서 20대 초반 아이돌이 이렇게
까지 호소를 하게 된 상황이 안타깝다. 하지만 회사를 욕보이냐는 식의 비난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리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알지 못하는 사회가 매정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재능 있는
젊은 그룹을 키우는 것은 너그럽고 깨어있는 어른들일 수도 있는데 고작 사회에 복종하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기성의 목소리가 마치 물 한 방울 없는 논바닥처럼 메마르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메마른 사회 속에서 그나마 살아있는 감성을 일깨워줬던 그룹에게 본인들의 생각은 접고 법과 회사의 지침이나 잘 따르라는 댓글을 붙여 넣기 하는 이들이 K 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나 한 걸까.
빛나는 재능을 가진 한 명의 아티스트는 절대적인 파워를 가진 것처럼 영상에서 비치지만 사실 그것은 그 한 사람 만의 능력으로는 발휘될 수 없는 빛이다. 우리가 아는 '스타' 별의 기원은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빛들이 그 한 존재를 비춰준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모두의 마음이 한 곳에 모여 우리 스스로
그 한 명의 스타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결국 빛의 발신지는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수가 노래하기 위해 기반하는 그 창작공간과 작업환경 소속사의 지원, 주변인물들의 도움 팬들의 호의적인 태도 없이는 가수가 무대에 설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대하나하나가 사실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라는 기적 같은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그 주인공들이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여론이 좋지 않고 아티스트가 불편을 호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소속사나 그룹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단순히 빌보드 순위만 보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영진이나 그룹이 있다면 너무 단기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그 가수가 10대 후반의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 아티스트라면 더욱더 조심스럽다. 앞으로 나갈 세상이 창창한 아티스트에게 무참히 꿈을 존중하지 못하는 행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예의를 갖춘 진짜 어른다운 모습을 보지 못할 때 마음은 상당히 불편하다. 또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고 배우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모방과 습득을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아깝고 젊은 다섯 명의 멤버들을 너무 빨리 잃고 싶지 않다. 그것은 K-pop의 다양성을 사랑하는 팬들 입장에서 너무 큰 손해가 아닌가
뉴진스가 아이돌 인지도가 높은 그룹이기 때문에, 모든 사례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사실 하이브도 한국회사이고 한국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구조적인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감성과 재미는 생각보다 키우기 힘든 한 송이의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창의성을 중시하는 한국 대중음악 언론방송분야에서 조차 창작자나 제작진의 목소리나 권한은 작기만 하다는 것을
그들이 보여준다.
우리는 날마다 언론을 통해 이들의 경영권과 자율권이 얼마나 쉽게 침해되는지 보도를 통해 듣는다. 뉴스 콘텐츠를 만들건, 예능콘텐츠를 만들건 제작자의 자율성은 정권의 색깔에 따라 위원회의 선정에 따라 종이 한 장의 두께만큼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권력자에게 방송이나 언론은 너무나 손쉬운 존재라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하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방송에서 높으신 분들의 임명동의안은 결국 권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가.
실질적인 내용이나 생산성과 관련 없이 권력중심으로 편성된 콘텐츠는 무기력하다. 개성 없이 만들어진 생산물들은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감동도 재미도 주지 못한다. 공중파가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영혼 없는 제작자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이 이상으로 나올 것이 뭐가 있나 싶다. 딱히 의견을 내놔도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구조에서 창의성이란 대체 어느 회사 이름인 건지.
그래도 사회는 돌아가긴 한다. 단지 신선함과 창조성이 없는 상태로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저출산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낳으라고 하긴 한다. 이유는 사회가 명목상의 유지라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뉴진스도 그 대를 잇는 신선한 그룹도 아마 없을 듯하다. 창작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개념 없이는
20대 초반에 대학에서 신문기사라는 것을 처음 썼다. 처음에는 내 기사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과 반응을 보여주는 것에 놀랐다. 그다음부터 나는 내 창작물에 좀 더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읽는 사람을 생각해서. 그리고 남겨질 기록에 대해서. 3학년이 될 때까지 최대한 공들여서 썼다.
그러나 이런 나의 어린 꿈은 한 명의 어른에 의해 결국 깨지고 말았다. 주임교수로 들어온 한 명의 사람이 본인의 권한으로 언론을 개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부당했다. 기사들은 결국 신문에 실리지 못했고 기자들은 그만두는 것을 택했다. 조직은 분열되고 학생들에 의해 힘들게 유지되던 교내언론사는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3년간의 노력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존중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내 꿈에 대한 가치만은 아니었다. 그 이후에는 뭔가 나 스스로 맞다는 것을 생각이 들 때조차도 스스로 검열하고 쳐내는 습관이 생겼다. 더 이상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창의적인 것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어도 꽉 막힌 것처럼 더 이상 글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졸업 후에도 계속 관련 직종에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본인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 '내 잘못이 아니었어'라고 말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막상 부당함 앞에 부딪히니 나는 나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에 그 주임교수가 학생과의 성추행 문제로 결국 해임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하지만 지난 시대의 피해자인 나 조차도 말을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학생에게 명백하게 정신적인 피해를 입힌 건 교수임에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껄끄럽기만 했다. 다른 사건에 대해 그렇게 많은 고발기사를 써왔던 나도 본인에게 닥친 사건을 떠올리면 결국 본인이 모자라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처럼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그 이후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동기도 선배들도 이후에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더욱이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옆에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상처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았다. 트라우마는 결국 시간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 관련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결국 알게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아닌 진짜 어른이 되는 방법은 과거와 자신에 대한 해석을 바꾸는 것이라는 걸. 억울한 일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걸.
젊은이들이 문제 제기를 하는 사회. 이 사회가 이상한 걸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회가 이상한 걸까?
본인의 몸이 아니라고 하고 스스로가 생각마저 도저히 이건 아니라고 느끼는데 그것 이상으로 더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더 필요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닌 건 아닌 거다. 본인이 의사이건 아이돌이건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 계속한다면 아마도 몸이 아플 것이다. 그것도 많이.
결국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어른들이 본인 이야기를 멈추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이 본인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보다 새로운 세대의 요구조건에 필요성을 인정하고 지원하고 존중하는 것. 그리고 젊은 세대 스스로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견을 말하는 사회말이다
뉴진스 사례를 보고 겪으면서 느낀다.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과거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