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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Sep 26. 2024

30년대 건축학도가 시를 쓰면 생기는 일..

공간과 시가 만날 때

공간적 공포가 주는 효과


한동안 인터넷에는 백 룸 공포물이라는 게 유행했었다. 사람이 없는 빈 건물을 돌아다니는 게임인데

변형도 많지만 오리지널 버전은 공포장치라는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출구도

없고 길도 정해지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나 혼자 걷는 것이다. 배경은 초현실적일 정도로 너무 생생하게

구현되어 있어서 내가 실제 그 공간에 있는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아무런 공포장치도 없고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 빈 공간이 주는 효과가 의외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백 룸으로 많이

나온 수영장이란 공간은 타일로 이루어져 있고 걸으면 내  숨소리와 발소리만 울린다. 대체 이런 게임을 왜 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공포가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나 혼자 어딘가에 떨어져 있고,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상태일 때 느끼는 공포감 말이다. 대체 몇 층인지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지, 출구가 있긴 한 건 지 정보가 없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뭘 할까. 일단 무작정

걸어보는 것이 대부분의 선택이다. 그런데 내가 갔던 길을 표시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 원위치에 왔을 때

여기가 갔던 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지나친 길이나 가고 있는 길이나 별 차이점이 없을 때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차라리 게임에 누구라도 등장하면 좋겠네 라는 단어다. 

그 캐릭터가 좋을지 나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을 찾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가 보다.



우연히 시인 이상의 시 '오감도'를 물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기사를 보고, 다시 시를 찾아봤을 때

뭔가 그 안에 숨은 공간이 사실은 백 룸의 공포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인은 완공 전

빈 건물을 이동하면서 설계도 뒷면에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종이 위에서 추상과 이미지, 그리고 기호 그리고 각종 수학적 물리적 개념들.. 이 교차하고 오갔을 것이다. 그의 말로는 이렇게 쓴 시만 3천 편이라니..

세상에 드러난 건 아주 일부에 불과했는데, 만약 다 그것이 세상에 나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싶다.

https://youtu.be/81 QGmlbnu_c? si=eRIyyfgJpXJhabzA


*사고가 이미지에서 개념화, 추상화되는 과정

초 1 된 딸아이는 꽃이라 하면 그림을 그린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꽃이라는 글자와 그 의미 간에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아이는 첫 번째로 꽃이라는 글자가 실제의 이미지와 닮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전혀 아니다. 꽃이라는 말소리와 이미지를 서로 잇기 위해서는 문자와 의미 사이에 추상적인 개념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듯 숫자와 한글을 썼다. ㄲ ,ㅗ , ㅊ 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데는 한참 걸렸다. 숫자도 마찬가지였다. 십진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이라는 숫자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변할수록 숫자가 증가하거나 증감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교적 쉬운 개념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추상화해 사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부분이라서 특별한 교육적 훈련이 없이는 개발되기 어려운 능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른인 내가 개념화된 사고 속에서 다시 구체적인 사물로 이미지를 바꿔보는 것은 쉬울까?

일단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못된다. 나는 꽃이라는 글자는 쓰지만 구체적으로 꽃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차라리 계산을 하라면 하지만 머릿속에 이미지화돼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더 어렵다. 무엇보다 키워드는 생각나도 구체적인 정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잘 되지

않는다. 내 머리 회로가 아이에 비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시를 가르치는 방식은 대체로 시어를 찾고 그 의미를 해석해서 말로 풀어내는 과정이었다.

대부분의 시는 시간적 흐름이나 역사적 의미, 역사를 담은 공간을 배경으로 한 것들을 읽어내는 방식이어서

'아 이 시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이런 행동과 업적을 했구나'라는 해석 정도만 해도 이해가 가능했었다. 말 그대로 한 방향으로 쭉 나아가는 단순한 시간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것 말이다. 그것은 지식적 차원의 이해였다. 외우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에게 부족한 것은 공간적 사고였다. 문학 시간에 나오긴 했지만 이상의 시에는 문자로만 풀어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공간적, 수학적, (심지어 물리학적)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니 가르치는 선생님도 제자들도 이해할리가.


어른이 되어 시가 말 그대로 그림이고 그림이 곧 시라는 새로운 개념을 대입해 그의 시를 다시 풀어본다. 무엇을 그림으로 보고 무엇을 글로 읽어야 하는 걸까. 아직도 어렵다.

그의 백 룸 같은 시에서 '이길로 쭉 가세요. 돌아가세요. 멈추세요'라는 안내문 같은 것이 있을 리가. 하지만 다른 접근법으로 볼 때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희망을 걸어본다.





오감도 제1호로 들어가 보자.


오감도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해가 좋은 날 건축기사인 이상은 완공식을 하기전 건물의 조감도를 들고 빈 건물을 천천히 돌아본다.

마치 백룸처럼 조용한 공간에서 본인의 발자국만 들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제일 높은 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곳에는 멀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길이 보인다. 이상은 

펜을 들어 조감도를 그리듯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설정인물, 설정 배경, 설정 상황... 이 모든 것을 마치 영화감독처럼 영상화해 시나리오처럼

지면 위에 쓰기 시작한다. 시는 기호화된 그림이면서 건축이고 문자이면서 개념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과 현실이 작가에 의해 재해석되어 복합된 추상물로 바뀐 것이다.


이를 바탕해 시가 지금은 영상화되어서 내 머릿속에 다시 재생해 본다. (마치 오징어 게임 같다)

건물 안에 길고 폐쇄적으로 느껴지는 복도형 공간이 있고 거기에는 13명의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모두 깎은 머리에 검은 옷을 입었다. 아이의 개별적인 표정이나 특징은 없다.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캐릭터이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복도 끝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복도 끝이 막혀있기 때문에 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다시

사이렌이 울리면 또다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계속될수록 아이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가 올라온다. 언제까지 이 행동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13인의 아이들이 서로를 잘 모른다는 설정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우리 안에

결국 감시자가 있을 수도 괴물이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다. 아이들은 서로 누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겁이 나면서도 서로 물어보지 못한다. 자기들 안에 누군가 '무서운'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무서워한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 길 끝이 막혔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러나 달리다 보니 막히든 안막히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끝이

막혔으니 결국 다시 제자리에 오고, 막힌 길이 뚫렸다고 해도 그것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아이는 꽥꽥 소리도 지르고 반항도 하고 어떤 아이는 순종하기도 

하지만 작가적 둘 다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다 갑자기 시의 뒷부분에서는 모든 설정을 허무하게 포기하고 만다. 13인의 아이 중에

누가 무서운 아이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길이 막혀있든 뚫려있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한 시작 끝에 모든 설정적인 촬영이 끝나고 결국 밖으로 향하는데 나가는 그 문도

왠지 후련하지 않다. 나오는 뒤로 뭔가 '쩡'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을 듣고 아이들은

만약 저기에 내가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한다. 촬영장 주변 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 떼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면서 영상은 끝이 난다. 날은 매우 흐리다. 

결국 공포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경쟁적인 상황에서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다. 관객으로 앉아있는 나 역시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시는 공포를 다룬 상황적 요소와 인물 그리고 심리 이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 

한 편의 공포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다.


13이라는 숫자도 여러 해 석이 있긴 하지만 결국 홀수라는 것에 무게감을 두고 싶다.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짝이 있다는 소외감을 의미하는데. 결국 나만 집단에서 

왕따인 느낌은 마치 외부인의 시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과 비슷하게

매우 거리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끼리도 친하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제3의

눈도 냉정한 감시자의 눈이기 때문이다. 마치 CCTV처럼. 우리가 무얼 하든 항상 우리는

감시되는 대상이며 그 감시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도 없다는 논리 

때문이다.


내가 2024년에 보는 여러 가지 게임적 설정, 영상적 설정들이 1930년대 작가 작품에도

녹아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시를 읽다 보니 매크로에 대한. 괜한 생각이...)

그는 사회맥락적인 측면에서 익명성과 전체주의 사회와 감시사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그가 일본의 감시 아래에서 모든 것을 계획해서 

작품화했다는 것도 일종의 메시지로 작용했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90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가장 한국스럽지만 글로벌로 승화돼버린 오겜. 영화적 상상력의 밑바탕에는 여러 바탕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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