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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Feb 23. 2024

나의 독서 연대기

-읽으면 다른 세계로 가는 포털을 처음으로 발견하다-

판타지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우연찮은 계기로 신비의 공간에 들어가게 되는 설정이 자주 나오는데 나는 어린 시절 책을 통해서 내가 그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하곤 했었다. 마치 엘리스가 거울로 넘어가는 그런 순간과 비슷하달까. 마치 다른 차원의 문으로 건너가듯 그 세계의 문은 책 속에서 열렸다. 그때 책이라는 포털을 통해 바라본 다른 세상이 주는 짜릿함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재밌는 책에 빠지기 시작하면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 며칠을 그 세계에 빠져있을 정도였으니까.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미루고 싶을 정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나를 끌어들인 책들이 하도 많아서 초등 4,5, 6학년 정도엔 도서관에 상주할 정도였다. 방학이면 도서관에 못 가는 게 아쉬워서 여는 날짜를 기다렸다가 매번 문닫힌 도서관에서 실망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다른 누군가는 이해를 못 했을 것이다. 제는 외골수에다가 딱히 할 일이 없나 보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책으로 떠난 모험이 얼마나 나를 감동시켰는지를. 신기하게도 주인공의 생생한 모습과 긴장감을 일으키는 줄거리는 오로지 내 머리 안에 있었다. 영화나 만화에서 그린 주인공의 얼굴은 내가 생각한 모습과 약간 닮았을 뿐 많이 달랐다. 내가 생각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미지와 그에 대한 사랑은 오로지 나만 가질

수 있는 나의 상상창고에 존재했다.

 그래도 친구가 그리울 때가 있어서 가끔 하굣길에 친구에게 책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영화는 나오기도 전이었다. 친구는 내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나는 머리를 써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늘 이야기를 끊어서 친구가 그다음에도 집에 같이 가게 만들었던 것 같다. 뭐 그것도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가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안타깝지만 친구와 책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나의 그런 독서력이 생겼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나 역시 책에 관심이 없었다.  딱히 재밌는 것도 없고 지루한 어린 날들 가운데 시간을 엄청 빨리 보낼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관심 있는 책은 고작 캐릭터가 귀엽거나 만화처럼 그림이 많거나 한 책들이었다. 혹은 학습의 목적으로 부모님이 사다준 학습만화류가 대부분 내가 읽었던 책들이었다. 

책과 친해진 것도 이렇게 한 가지를 관찰하는 버릇, 관심 있는 것을 굉장히 오래 기억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도서관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어린이를 위한 <아라비안 나이트> 전집을 찾아서 읽게 되었다. 책은 무려 10권이 넘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다음은 미카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였다.


(학생들에게 하루에 독서 10분라는 과제를 주는 것은 독서의 힘을 기르기 위해 맞는 것 같지만 사실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책에 관심이 없으면 10분 읽는 것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관심 있는 영화를 본다고 생각해 보라. 단 10분만 보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지 않을까. 독서를 비문학과 문학, 장르문학으로 나누어서 어느 쪽만 정해주고 골고루 읽으라고 하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수준에 이르면 독서력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 같다. 어린아이가 글자 하나하나 읽기를 하다가 책 한 권이 통으로 그 의미가 다가오는 그 수준에 이르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순간인가. 한 권을 아주 잘 읽고 나면 그다음에는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무엇을 알고 싶고, 그다음에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말이다. 비문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말이다) 


내가 처음 읽었던 책들은 읽기 편하면서도 지나친 요약은 하지 않아서 재미도 있었다. 처음으로 읽은 장편과의 만남치곤 시작이 좋았던 셈이다. 그 덕분에 줄기차게 이어져가는 이야기의 바다에 빠진 경험은 '몰입'이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도구인지 알려주었다.

'몰입'하는 동안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놀아달라고 애걸할 필요도 없고,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 가지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이야기가 또 펼쳐지는 마법. 마치 아내를 죽이는 나쁜 왕 옆에서 나긋나긋한 세헤라자드가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나는 그 마술적인 세계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있는 20권이 넘는 어린이 창작동화 전집도 도전해 보고 외국작가들이 지은 동화 전집도 시리즈로 된 것을 거의 다 읽었다. 그 단계에 가니 단행본은 왠지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과학책 같은 류는 읽어도 재미를 못 느껴서 대신 학부모와 교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코너에 가서 이것저것 책장을 뒤져보곤 했다. 당연히 글씨도 너무 많고 내가 읽기엔 너무 어렵고 힘든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그때 그렇게 봤던 책들 가운데에 <빨간 머리 앤> 시리즈의 후속 편 들을 지금의 나이가 되어 읽고 있으니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빨간 머리 앤이 어른이 되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항상 상상의 영역에 있었는데, 실제로 작품 속에서 어른이 된 앤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쩌면 책 읽기도 평생 나랑 같이 성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곳은 선생님만 아는 특별한 방. 즉 오래된 도서만 따로  빼놓은 장서보관공간이었다. 그곳은 항상 열쇠로 잠겨있었는데 나는 마치 비밀의 정원에 못 들어가게 된 주인공처럼 늘 그곳이 궁금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청소를 목적으로 그곳이 열릴 때가 있었는데 나도 한번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본 것은 아주 오래된 어린이 책들이었다. 엄마 아빠가 어린 시절에나 읽었을 법한 어린이 창작 동화들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작가들 이름을 읽었다. 이원수. 어효선.. 우리나라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어린이를 위해 이렇게 순수한 동화를 쓴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나는 어린이를 위해 그분들이 쓴 동화에서 그 깨끗한 마음에 감동받았다. 나는 어른이 되어 존경하는 그런 작가들처럼 되고 싶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이들과 만화카페에 갔다가 도라에몽 1권을 발견했다. 항상 느리고 힘도 없어서 매일 퉁퉁이한테 당하는 진구. 그런 진구를 도와주는 건 도라에몽인데 도라에몽은 미래의 진구가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아이들은 상상 속의 세계에서 어려운 것도 해결해 주고 귀찮은 것도 없애주는 도라에몽 같은 친구.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상상 속 친구는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 애니메이션이나 책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언젠가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돌아보면 나를 위로해 주고 자신감을 충전해 주는 존재가 항상 있었다는 걸. 이야기의 힘은 아마도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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