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학기 시작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나는 한 동안 시차 적응을 하느라고 거의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고생을 했다.
미국 '국내' 여행이었는데, 시차가 달라 적응하는데 고생을 하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였지만, 적응하는데 2주나 걸려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밤잠을 설쳤다.
다가오는 봄 학기에 대해 나는 또 걱정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들로 채워 넣기 했지만, 교수님들에 대한 강의 평가들을 보니, 많은 양의 읽기 자료와 에세이를 한 학기 내내 작성해야 한다는 리뷰들로 가득 찬 수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여전히 영어가 부족한 나인데, 퍼뜩 학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지레 겁을 먹었다.
그리고, 대부분 수업들이 아침 9시~10시에 시작을 해서 나는 살던 곳에서 학교까지 수업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면 아침 6시에서 7시에는 일어나 준비를 하고 버스를 타고 뉴욕에 도착해야 했다.
그렇게 봄 학기가 시작됐다.
수업들은 정말 흥미로웠고, 교수님들도 다들 열정이 넘치시는 분들이었고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도 정말 착하고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교육학 수업은 내가 미국에서 들었던 수업들 중 정말 최고의 수업이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재밌고 유익했다.
그래도 여전히 통학이 힘든 건 사실이었다. 매일 거의 4~5시간을 통학하는데 쓰니, 안 그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등교를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체력이 여간 지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과제가 많아 과제를 해야 하는 시간이 통학에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거기 다 일주일에 한 번 나는 인턴 일을 시작했다.
살던 곳에서 30~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비영리 단체에서 인턴 일을 시작했다.
사회복지학 수업 과제 중에 비영리 단체에서 인턴 혹은 봉사활동을 20시간 동안 해야 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비록 무급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인턴으로서 경험을 쌓아놓는 것은 훗날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비단 과제 때문이 아니라 경험 쌓는 것이라 치며 여름까지 미국에 남아
계속 이 단체에서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일하는 곳의 모든 분들이 나를 좋아해 주셨고,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그리고 나의 사수였던 분이 나에게 여름까지 인턴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나도 어차피 미국에 남아 여름학기를 듣고 갈 예정이었으므로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었다.
일상이 계속 바빠지다 보니, 통학이 더욱 벅차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살던 곳을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통학이 힘들었던 점도 있었지만,
슬슬 친척 집에서 지내는 것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도 한 몫했다.
친척 집에 신세 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서로가 많이 불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집 매물들을 살펴보고, 실제로 많은 매물들을 직접 방문해 살펴보았다.
"뭐.. 방이야 너무 엉망만 아니면 상관없고, 안전하기만 하면 되니깐.."
문제는 내가 방을 학기가 시작할 때쯤 알아본 탓에 이미 좋은 매물들은 다 나가고 없다는 점이었다.
간간히 올라오는 좋은 매물들은 약간 위험한 동네에 있어서 고민이 많이 되었다.
나는 그래도 그중에 괜찮은 매물들을 몇 개 추려 부모님께 전화해 상의를 해보았다.
부모님은 나의 이사에 대해 걱정을 하셨는데,
이유는 내가 알아본 집 매물들 근처에 차이나 타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한국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유행하고 있을 때였고,
미국에서는 조금씩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시애틀 쪽의 차이나타운에서 감염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부모님은 차이나 타운이 있다는 나의 말에 염려를 하시기 시작했다.
"혹시 거기 사는 사람이 감염자와 접촉했다거나 중국을 방문했을 확률이 뉴욕의 다른 지역보다는 높지 않겠니? 치안도 다른 곳에 비해 위험하다고 하니 조금 걱정이 된다."
"그래. 아빠 말이 맞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유덕아."
"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타지에서 내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의료 시스템이 우리나라처럼 잘 되어있지 않고,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질지는 뻔할 것이었고, 치안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
나도 굳이 내 건강과 안전을 담보로 성급하게 그 동네로 가는 것으로 결정하지 않고
더 시간을 가지고 좋은 매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결국 친척 집에 더 남아 학교를 다녔다.
한창 한국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리였다. 매일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한국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미국에서도 슬슬 감염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뉴욕에서 첫 번째 감염자가 나왔을 때는, 학교에 갔을 때 모두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얘기를 했다.
이미 뉴욕대나 컬럼비아 대학은 학생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변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업에 가니 친구들은 우리 학교는 왜 문을 안 닫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다가올 일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코로나 사태가 곧 종식될 것이라는 안일함
에 빠져있었다.
그저 학교 다니고, 인턴 일 하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사실 미국 사람들도 크게 개의치 않고 다들 자기 일들 하느라 바쁜 듯했다. 나 또한 그랬다.
교수님들은 수업 시간에 종종 코로나 바이러스 얘기를 하곤 했다.
"뉴욕을 보세요. 평소 뉴욕의 위생을 보면 벌써 우리도 다 조금씩은 알고 있지 않나요? 이미 바이러스는 뉴욕에 뉴스에서 발표한 것보다 훨씬 많이 퍼져있을 겁니다. 그래도 너무 겁먹지 마요.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은 괜찮을 겁니다. 나 같은 늙은이들이 걸리면 문제인 거지. 하하하하."
그렇게 불안감 속에서 학교를 한 달 반 정도 계속 나갔다.
통학과 학교 생활, 일은 여전히 힘들고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임했다.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던 것일까.
진짜 다시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그래도 예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하루들이 이어졌던 나날들에 비하면
지금의 바쁨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무언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시간은 금방 흘러 봄 학기 중반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