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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덕 Sep 15. 2020

24살, 귀국 (3)

한국으로 돌아오다

나는 그 집에서 나온 뒤 원래 지내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두 분이 사시던 곳이라 장소가 조금 협소해 내 개인 공간은 없어졌으나

갑자기 쫓겨나 지낼 곳이 없는 처지에 당장 지낼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또한 외할머니와 같이 지내다 보면 엄마랑 같이 지내는 기분이 들었다.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유덕아, 일단은 할미 집에서 편하게 지내라. 할머니가 주변에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서 방 구해줄 테니까,

넌 여기서 편하게 지내는 것만 생각해라. 이 할미가 안 그러면 서운해."

"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할머니는 나와 외삼촌 일 때문에 충격을 크게 받으신 것 같았다.

연신 혼잣말로 내가 어찌 저런 것을 낳았을꼬 하며 한탄하셨다.


외삼촌을 마주치지도, 상대할 일도 없다는 점은 좋았지만,

문제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야 했다는 점이다.


외삼촌도 나에게 자신의 못남을 나에게 끊임없이 드러냈지만, 외할아버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치부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끝도 없으니 일일이 얘기하면 내 입만 아플 뿐이다.


외할아버지는 매우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이시다.

옛날에 군인이셨기에 다른 분들보다 더욱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했지만,


남을 너무 막 대하고 함부로 사시기에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을 외삼촌 상대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싫어했다.


내가 그 집에서 지낸 지 한 3일째가 되던 날이었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싸우셔서 얘기를 안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역시나 할아버지의 막가파식 행동 때문에 할머니가 뒷수습을 하시다가 다투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할머니는 계속 침대에 몸져누워계셨다.

아마 여러 일 때문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신 모양이었다.


이 무렵 미국의 코로나, 특히 뉴욕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닌 지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수업 전부를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돌린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한편으론 더 이상 힘들게 통학을 안 해도 된다는 점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이를 중간에서 중재해야 되는 데다가 할아버지의 성격을 온종일 전부 받아내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뻔했기에

마냥 또 좋지만은 않았다.


예상대로 아주 쉽지 않은 시간이 펼쳐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같이 싸우셨고 나는 그 사이에 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유일하게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시간은 저녁을 먹고 잠시 집 앞에 나가 산책을 하고 들어오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밤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지!


이마저도 뉴저지 일대에까지 코로나가 심해져서 통금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잘 나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8시면 주무시는 두 분의 눈치를 봐가며 과제와 공부를 해야 했다.

정말 2017년 이후 내가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소식을 전해 들은 엄마와 이모들로부터 매일 전화와 연락이 왔다.

네가 고생한다는 말, 조금만 참아달라는 말, 어른이 돼서 옆에서 도움이 못 돼 미안하다는 말 등.


뭐... 엄마나 이모들과 통화하면 나 스스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긴 했으나,

그래도 역시 집에 들어가면 할아버지와 매일 실랑이를 해야 했다.

거기다 할머니의 건강이 좀처럼 호전되질 않으셨다. 할머니는 매일 침대에 누워서 많이 아파하셨다.


구급차도 여러 번 부르고 병원도 가보고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이렇다 할 조치를 못 해

계속 이유를 모른 채 아프신 상태로 누워계셨다.


할머니를 간호하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싸움을 중재하랴, 할아버지의 괴팍한 성격을 받아내랴,

과제하랴, 공부하랴, 시험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점점 이 집에서의 생활이 내가 공부하는 데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것에 참다 참다 이 곳에서 당장 나가겠노라 결심했다.


집을 못 구해도 좋으니, 일단 임시 거처를 구해서 거기서 지내며 다른 집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냥 이 집에서 하루빨리 나가서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다른 거처를 구해서 그 집에서 떠났다.

거처는 뉴저지 한인 타운에 있는 유명한 민박집.

코로나로 인해 여행객이 끊겨 비교적 쉽게 방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나오는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나가지 말고 이 집에서 지내라고 역정을 내시는 바람에

그거로 또 실랑이하는 과정 속에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어쨌든 결국엔 그 집에서 나왔다.


민박집에 도착한 나는 짐을 풀고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너무 편했다. 얼마 만에 찾아온 평화란 말인가.

천장을 바라보며 그간의 상황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피식 터뜨리며 욕을 했다.


"시발.. 웃기지도 않네.."


그렇게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다 잠깐 잠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저녁 7시쯤 되었다.

저녁을 먹고 과제나 해야겠다며 근처 한국 마트에서 사 온 햇반 하나를 들고 민박집의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나가자 민박집에서 지내고 있는 다른 두 분이 밥을 같이 먹고 있었다.

두 분은 나에게도 같이 밥을 먹자며 권유했다.

나도 자리에 같이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자신들의 배경에 대해 서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있자 위층에 있던 다른 한 명도 내려와 넷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민박집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이었다.

각자의 배경이 아주 흥미로웠다.


미국계 한국인이었던 분도 있었고,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한국에서 떠나와 일을 하고 있는 분,

미국이라는 땅에 와보고 싶어 코로나 시국을 다 뚫고 미국에 인턴을 하러 온 대학생까지.


서로 코드가 잘 맞아 금방 친해져서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오질 못해서 같이 계속 있다 보니 더 그러한 경향도 있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파티를 하다시피 하고, 한번 얘기를 시작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3~4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있었다.


지난 한 달간의 갈등과 스트레스뿐이었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민박집에서의 생활은 내가 스트레스를 느낄 겨를도 없이 재미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눈치도, 간섭도 없이 내가 할 거 하면서 혼자만의 온전한 시간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과도 재밌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뉴욕 일대의 코로나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숫자로 정말 하루에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염자가 발생해 국가 비상사태급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매일 전화가 왔다.

특히 엄마는 매일 불안 속에서 내 건강과 안전을 걱정하며 전화할 때마다 불안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거셨다.


하루는 엄마로부터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아들, 몸 건강하지? 거기 지내는 건 어때?"

"너무 좋아. 더 이상 스트레스받을 일 없어."

"그래 잘 됐다. 유덕아, 엄마가 이모랑 외숙모랑 얘기해봤는데 너 거기서 계속 지내는 거... 어떨 것 같아?"

"뭐가?"

"미국에서 계속 있을 거냐는 말이야."


엄마는 나에게 미국에서 계속 지낼 것이냐는 질문을 하셨다.

사실 그동안은 불안해도 밖에 나가지 말고 몸 조심히 지내라는 말만 하셨을 뿐,

나에게 이러한 언급을 하신 적은 없었다.


"뭐.. 잘 모르겠는데.. 사실 유학생들 다 한국으로 돌아가긴 했어."

"아 그래..? 너도 돌아와야 하나..? 하유.. 상황이 너무 급변하니까 엄마도, 아빠도 판단이 잘 안 선다."

"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그래도 네가 거기 있으니까 우리보다 상황을 더 잘 알겠지. 뭐 돈, 이런 거는 걱정하지 말고 니

안전과 건강이 최우선이니까, 하루 동안 잘 생각해보고 엄마한테 알려줘."

"음.. 일단 알겠어."


엄마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끊고, 생각에 빠졌다.

아직 한창 학기 중인데,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비대면 수업이라지만 많은 것을 리스크로 안고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여기저기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지금 돌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이번 여름 계절학기까지 듣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에

계절학기를 듣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것은 내 계획에서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긴 시간을 고민해본 결과..

한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뭐 그렇게 많은 유학생들도 전부 대책 없이 돌아가진 않았을 거고,

나도 복잡하게 생각하기에는 최근 한 달 동안의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뉴욕의 코로나 상황이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아 여름학기도 비대면 수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점을 전부 고려해보았을 때,


다시는 이 곳에 여행을 제외하고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한국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을 내리고 부모님에게 다음 날 전화해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나는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비행기 표를 사는 것부터 해서, 공항까지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택시 예약, 교수님들한테 메일 보내기, 학교에도 연락하기, 짐 간추린 뒤 짐 싸기, 연락 돌리기 등등..

해야 할 것이 꽤나 많았다.

 

이와 동시에 수업도 들어야 했기에 꽤나 정신이 없었다.


떠나기 이틀 전, 대부분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또 사색을 했다.

지난 1년 반 정도 미국에서 지낸 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너무 어이없게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 같아 조금 허무했다.

 

"진짜 허무하게도 끝나네.."


2년 전에 이 곳에 올 때만 해도 미국에서 이렇게 돌아가리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당찬 포부들이 갑자기 생각나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현실은 모르고 이상만을 좇는 초심자의 마음가짐이랄까.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설정한 목표들을 대부분, 어쩌면 그 이상으로 성취하고 돌아갈 수 있었기에

만족하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미국으로부터의 귀국과는 좀 다른 분위기가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1년 반 정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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