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훈련소
입대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논산으로 향했다.
논산이 할머니 댁인 천안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할머니 댁에 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끔씩 짧아진 머리를 쓸어 넘길 때면
그래도 나도 이제야 군대라는 집단에 짧지만 속해 보기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논산 훈련소에 도착해 SNS로만 봤던 호국 요람이라고 적힌 입구에 도달했다.
사실 4주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바로 나온다는 생각에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혼자 계속 훈련소 안을 걸어 들어갔다.
훈련소 안에 들어오자마자 각종 코로나 문진을 거친 후에,
커다란 축구장 같은 곳에서 2시간 동안 앉아서 소대와 분대, 교번을 배정받았다.
날이 많이 더웠다. 땀은 이미 범벅이 된 상태로 그냥 가만히 앉아 한참을 기다렸던 것 같다.
30분은 지났겠거니 하고 시계를 쳐다보면 5분이 지나있었다.
친구들이 말했던 군대에서의 시간과 사회에서의 시간은 다르다고 하던 게 이제야 실감이 됐다.
첫날은 각종 보급품과 설문들을 해야 해서 정신없이 지나가긴 했다.
바로 군대 시간에 맞춰 10시에 잠들진 못하고 2시간 정도 뒤척이다 12시쯤 잠들었다.
다음 날 그 유명한 군대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일어나 침구류 정리를 했다.
코로나가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는 만큼 생활관 내부에 있는 인원 모두가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전원 음성 판정을 받는 다음 주 정도까지는 계속 생활관 내부에서 모든 교육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첫 주차에는 정신교육이 주를 이뤄서 교육 일정에 크게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들어온 지 3일 차만에 주말을 맞았다. 코로나 검사 결과 전원이 아주 깔끔한 음성이라는 좋은 소식을 받았다.
1주 차 본격적인 훈련이 들어가기 전에 나는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우리 분대의 분대장으로 뽑혀 4주 동안 우리 분대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생각보다 훈련소에 빨리 적응했다.
분대원들끼리도 다들 빨리 친해졌고, 단체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크게 불편함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내 기억에 너무 재밌었던 남고 생활을 다시 하는 것 같아서 그 시절의 향수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고마운 점은 우리 분대원들이 나를 리더로 인정해주고 잘 따라주었다는 점이다.
내가 분대원들 중에서도 좀 형 라인인 축에 속하기도 했고, 분대장이라는 역할을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 분대원들이 잘 따라주지 않았더라면 4주간의 단체 생활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니 시간이 조금은 더 빨리 가기 시작했다.
날이 많이 더워서 힘들기도 했지만, 공익 훈련소라 그런지 조교나 간부들이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아무래도 현역들과는 다르게 신체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제약이 있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
훈련의 강도가 운동을 그나마 꾸준히 했던 내가 느끼기에는 크게 힘들거나 하지 않았지만,
많은 친구들이 힘들어했다. 아마 더운 날씨도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1주 차에는 대부분 제식이나 정신교육을 받느라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으나,
2주 차 사격 훈련부터는 무더운 날씨에 군복에 총까지 들고 훈련을 받는 것에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특히 실탄 사격과 수류탄 훈련 때는 긴장이 너무 많이 된 탓에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조교와 간부들의 통제 하에 안전하게 훈련이 진행된다고는 하나,
어쨌든 내 손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화기가 쥐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많이 되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던 탓일까?
훈련소에서 받았던 모든 훈련 평가들 중에 가장 실망스러웠던 결과를 받았다.
3주 차 각개 훈련 때는 날씨가 좀 시원해졌으나, 장대비가 자주 쏟아지는 바람에 진흙탕에서 굴러야 했다.
마지막 주차에 행군을 할 때는 그래도 날씨가 가을 날씨처럼 좋아져 비교적 시원한 날씨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많은 훈련병들이 힘들어했다.
행군을 하는 날에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날씨가 좋았다.
태풍이 온다기에 기껏 행군 일정을 조정했었는데, 그게 무소용이 되었다.
오히려 날씨가 너무 좋아 햇살이 내리쬐는 바람에 무더위 속에서 진행되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훈련병들이 많다 보니 행군 때도 완전 군장을 한 훈련병의 수가 많지 않았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 때문에 일정이 조정되어 오전에 행군을 시작해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오전에 좀 돌다가 생활관에 잠시 복귀해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군장을 메고 나갔다.
오전에는 그래도 완전 군장을 했던 인원이 꽤 있었는데,
오후에는 다들 오전에 해보고 힘들었는지 많이 열외를 하거나 단독 군장으로 바꾸어서 행군에 참여했다.
오후에는 정말 소대에 완전 군장을 한 사람이 눈에 꼽을 정도로 적은 상태로 행군이 진행되었다.
중대장은 연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행군할 때 허리가 아플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가방에 허리 등받이가 있어서 허리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오후에도 완전 군장으로 돌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나는 오후에도 완전 군장으로 행군을 돌았다.
오후에는 날씨가 더욱 더워졌다.
차라리 비가 왔으면 했다. 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끝까지 행군을 마쳤다.
행군을 끝마치고 들어오는 길에서 모든 훈련이 끝냈다는 해방감과 성취감이 들었다.
잘했건, 못했건 모든 훈련을 열외 없이 성실히 받았다는 점에서 나 자신이 뿌듯했다.
코로나 때문에 수료식을 하진 못했지만, 나는 그렇게 4주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했다.
수료하는 날 부모님이 데리러 오셨다.
차를 타고 논산에서 근처인 천안 할머니 댁에 들렀다 집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 댁에 가는 동안 부모님과 4주간의 짧은 훈련소 군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4주가 지나고 보니 짧게 느껴졌지만, 안에서는 어찌나 긴 시간이었던지.
아마도 하루가 일찍 시작하고 하루가 바쁜 탓이리라.
훈련소를 부모님 차를 타고 나오며 열심히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조교들을 보았다.
아쉽게도 그들과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훈련소 안에 있는 동안 현역 기간병들의 생활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조교들의 나이를 들었다. 대부분이 20살, 21살이었다.
그 이후, 조교들과 현역병들을 동생을 보는 시선으로 좀 보게 되었다.
특히 불침번을 설 때 당직으로 서며 새벽에 꾸벅꾸벅 졸며 졸음을 참아내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땐,
안타까운 마음이 다 들었다.
4주간의 생활 동안 무슨 놈의 잡무가 그렇게나 많던지.
나도 분대장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조교들과 함께 잡무를 처리할 때면
나도 힘들었지만, 그들이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분명 계급으로는 그들이 위였으나, 내가 형으로서 그들을 4주지만 열심히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 생각이 많이 났다.
녀석들도 분명 20살, 21살 때 이런 고생스러운 생활을 오래 했을 것이다.
괜스레 그 시절에 친구들에게 장난치며 놀렸던 게 미안해졌다.
이리저리 계속 불려 다니며 4주긴 했으나 바쁜 훈련소 생활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했으나, 마음은 상당히 편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잡지 않고 행동할 필요 없이, 그냥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그냥 시키는 거는 하고, 시키지 않는 것은 하지 않으면 되는 간단한 원리 속에서
행동하다 보면, 혼날 일도, 골치 아플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매일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던 유학 생활이나, 바깥 생활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고나 할까?
주유소 세차장에서 일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몸은 정말 힘들었으나 단순 노동에 잡생각이 들지 않아 마음은 참 편했었는데.
다시 전환점에 놓인 시점에 부대 안에서 잠시 생각이 쉬어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마음은 편했다.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생활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함께 매일 여러 육체적 활동을 하는 생활에
잡생각이 사라지고,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좋은 점이었지만,
내가 확실히 깨닫게 된 점은 나는 군대 체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소심하고 덤벙대는 성격에 실수를 연발했다.
훈련에서 분대장으로서 우리 분대를 잘 이끌었어야 했는데 실수투성이였다.
그래도 나를 형으로, 리더로 잘 따라줬던 분대원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군인과 현역 기간병들의 관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 여러 관점들 중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감사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