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우리는 급하게 천안으로 내려와 바로 단국대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계속 중환자실에 계셨다. 하지만 코로나 방역수칙으로 인해 여태까지 면회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환자가 고비일 경우에는 직계가족에 한해서만 면회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했다.
나를 포함해 엄마도 안 쪽에 들어가 면회를 하지 못했다. 오직 아빠와 고모들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아빠는 본인보다도 나를 꼭 들여보내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 하실 거라면서.
결국 나는 끝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중환자실 앞에 앉아 하염없이 대기했다.
할머니의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약을 계속 주입해 할머니의 혈압 수치가 정상이도록 최대한 노력하고는 있으나, 크게 호전은 불가하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저녁시간이 되고, 아빠와 큰 고모만 남아계시고, 나머지는 각자 해산했다가 할머니가 고비이실 때 다시 모이기로 했다. 우리는 할머니 댁으로 다시 돌아왔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아직까지도 실감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일까?
밤 시간이 되자 아빠에게 할머니가 힘드실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황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이후에 2시간 정도 더 그 앞에 앉아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나는 그 사이 밤바람을 좀 쐬고 싶어
밖에 나와 혼자 서있었다. 그리고는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중환자실 앞으로 오라는 연락을 하셨다.
도착하니 아빠와 큰고모가 중환자실 안에서 나오셨다.
"돌아가셨어요."
아빠는 담담하게 모두에게 할머니의 임종을 전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아빠와 고모들은 근처 친척과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어른들이 연락을 하는 와중에 중환자실이 열리며 할머니가 온갖 천으로 뒤덮인 채 나오셨다.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냥 저 안에 할머니가 누워계실 거란 생각에 계속 그 들 것만 쳐다보았다.
바로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급하게 상조회사를 알아보셨다.
정신없이 장례절차가 진행되었다.
새벽에 상조회사에 연락을 하고, 장례식장을 정하고 할머니 댁에 도착하니 벌써 새벽 4시가 되었다.
2시간 정도 자고 바로 출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눈만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2시간이 훌쩍 지나 엄마가 나를 깨우셨다.
옷을 급하게 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상조회사에서 나오신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하고 계셨고, 안 쪽에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포함해 꽃과 각종 장례 도구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상복으로 갈아입고, 아침부터 먹었다. 아직까지도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워낙 정신이 없어서인지,
그냥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침을 먹은 후, 본격적으로 장례식을 시작했다.
코로나이기도 하고, 아빠가 그냥 가족끼리 조촐하게 치르자고 해서 많은 분들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으셨다.
할아버지 때는 장례식장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계속 시끌벅적하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사람들도 많이 안 오고 워낙 갑작스럽게 치러지다 보니, 그리 바쁘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장례 내내 대부분 할머니 앞에 앉아 향을 피워드리거나 가족방에 들어가 침대에 잠깐 누워있었다.
5년,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어색한 친척들과 사촌들로 가득 차서 솔직히 자리가 불편한 데다가, 계속 허리를 숙여 절을 하다 보니 허리가 많이 아팠다.
그래도 장례식장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아직까지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멍하니 있다 보니, 입관을 할 시간이 왔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너무 어려서 입관을 보지 못했다.
내 첫 입관식 경험이었다.
아마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입관식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많이 무거워졌다. 장의사가 덮고 있던 천을 다 걷어내고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다행히 할머니의 얼굴을 평온해 보이셨다. 그냥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기도 했다.
장의사는 이제 한 명씩 돌아가며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라고 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할머니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도 이 순간에서야 눈물이 미친 듯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 나는 할머니 얼굴에 내 손을 살짝 올려보았다.
몸이 너무나 차가웠다. 사람 몸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가 있는 건가 싶었다.
나는 눈을 감고 할머니 얼굴에 손을 올린 채 속으로 할머니에게 말을 했다.
그녀에게 기대에 비해 항상 실망만 시키는 손자가 되어서 죄송하다고, 나에게 사랑을 보여줘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앞으로는 정말 바르고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인사를 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할머니가 입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는 울지 않으셨지만 말없이 할머니를 응시하고 계셨다.
나는 울고 계시는 엄마를 안고 옆에 서서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입관식을 마치고, 발인날이 되었다. 내가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서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산으로 도착해서 할머니를 잘 묻어드렸다.
장례가 끝났다. 지난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장례식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장례식의 분위기는 언제나 나를 압도했다. 또래에 비해서 장례식에 많이 와봤다고 생각했는데,
장례식에 갈 때건, 내가 직접 장례를 치를 때건 간에 참으로 어렵다.
이제는 불자셨던 할머니를 위해 절에서 49제를 지낼 것이라고 했다.
7주 동안 주말에 친척들이 돌아가면서 방역수칙을 준수해 참석하기로 했다.
나는 장례가 끝나고 서울에 오자마자 바로 2차 백신을 접종했다.
백신 접종 후 다음날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1차 때는 아무 느낌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2차 때는 이상 반응이 좀 있어서 첫 제때는 가지 못했다.
할머니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약 3달 정도였다.
슬슬 작년에 실수하던 서류도 준비하고, 이제는 지원할 학교도 정해야 했다.
이제 진짜 지난 3~4년간의 계획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코 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이번 편입은 나에게 증명, 해결해야 할 강박과도 같았다. 할머니에게도 꼭 당당히 합격해 말씀드리고 싶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더욱 합격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계속 평소처럼 공부를 해나갔다.
그러나 시험은 다가오는데 오히려 문제는 예전보다 잘 풀리지 않고, 모의고사 성적은 오히려 하향곡선을 그렸다.
아무래도 시험이 다가오고, 서류 준비에, 학교 지원까지 하고, 하던 공부도 계속해야 하는 와중에 계속 출근 은 또 해야 하니 여간 여유가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니 완벽하게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은 심해졌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많아졌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고, 더욱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강박이 심해졌다. 문제 하나 푸는데도 내 기준만큼 맞추질 못하면 계속 속으로 자신을 자책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틀리는 문제가 많아졌고, 실수도 잦아졌다.
어느 순간 나도 내가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인지했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여유와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조급함만이 생겼던 것 같다. 이때 친한 친구가 나에게 짧게라도 제주도에 갈 것을 우연히 제안했다.
시험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지만, 나는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다. 짧게라도 잠깐 다 잊고 쉬면 다시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4년 만에 방문한 제주도는 너무 좋았다.
비성수기라 사람도 많이 없었고, 하루하루 바쁜 계획에 치여살다가 바닷바람 쐬며 여유를 찾으니 생각할 시간이 많이 늘어 조금은 강박 같은 것을 덜어낼 수 있었다.
짧은 2박 3일의 여행이었을 뿐이었지만, 효과는 굉장히 좋았다.
돌아오니 다시 예전의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문제 푸는데도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고, 예전의 자신감도 되찾을 수 있었다. 미래로 가있던 마음을 다시 현재로 잘 돌려놓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시험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내며 열심히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