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주요 언론사와 금융권을 비롯한 기업들의 전산망이 마비된 적이 있다. 3.20 전산 대란이라고 부른다. 컴퓨터를 쓰지 못해 업무가 마비되던 날, 친구가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다. 종이에 손으로 Q시트를 적으며 방송하고 있다고. 정감 있고 재밌기는 한데 웃을 수는 없어서 좋아요만 눌렀던 기억.
버그 하나로 세계가 멈췄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크라우드 스트라이크 대란'이다. 3.20 전산 대란과 마찬가지로, 보안 프로그램 업데이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컴퓨터가 다운됐다. 3.20 전산 대란은 해킹이고, 이번은 그냥 프로그램 오류라는 것이 차이일까.
미국에선 3천대가 넘는 비행기가 결항됐다. 몇몇 방송국을 비롯해 국제 배송 서비스도 영향을 받았고, 교통 시스템이나 국가 건강 보험 시스템이 멈춘 나라도 있다. 이번엔 한국이 아니라 세계가 엿을 먹었다. 보안 프로그램 업데이트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 사실, 말이 되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버그 하나 때문에 세계가 멈추는, 무슨 SF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사고가.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죽음의 승리‘라는 작품이다. 16세기에 피터르 브뤼헐이, 인간 세상이 끝장날 때는 마치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는 풍경을 그렸다. 중세 아포칼립스라고 해야 할까.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 친구들과 식사를 하던 사람, 싸우는 군인,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 사랑을 노래하는 연인, 그저 길을 걷던 사람 모두 죽었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살아있는 것에 예외는 없다. 직업도 성별도 피부색도 차별하지 않는다. 나무는 베이고, 물고기는 뭍에 끌어올려진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이끄는 이는 수많은 백골이다. 죽어 사라진 자에 의해 살아있는 모두가 종말을 맞이한다.
이 그림을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모두 동의하는 의미는 하나다. 메멘토 모리. 기억하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디지털 정보와 네트워크도.
인터넷의 글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2918년 KT 아현 화재 사고를 비롯해 2022년 카카오 전산장애, 수많은 랜섬 웨어 감염 등,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사고가 잊을만하면 계속 발생한다. 한쪽에선 인공지능이 세계를 잡아먹을 것처럼 떠드는 데, 다른 쪽에선 기본적인 기능도 작동하지 못하는 사고가 연일 일어난다.
그저 잠깐 고장만 나면 다행이다. 인터넷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예전에 올린 홈페이지 게시물과 망해버린 인터넷 언론사의 글은 '사라진다'. 퓨리서치에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에 존재했던 웹페이지의 38%는 2023년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엠넷 뉴스도, 돈이 안된다고 없애면서 기사 전체가 날아갈 뻔했다(인터넷 아카이브에서 일부 복구에 성공했다). 망한 유명 잡지 웹사이트를 사들여, 가짜 리뷰를 남발하는 쓰레기통으로 바꾼 회사도 있다.
네트는 광대해... 였지만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처럼, 디지털이 영구불멸의 상징이었던 때가 있다. 디지털 콘텐츠는 어차피 실체가 없는 비트 덩어리. 그러니 무한 복제가 가능하고, 시작과 끝이 있는 아날로그 매체와는 달리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디지털이 어떤 ‘물적인’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적 기반과 디지털 정보는 서로 다른 것이라, 그저 잠시 거쳐 가는 장소 정도로만 여겼다.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그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Know What’이 아니라 ‘Know Where’을 알아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던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말해준다. 기껏해야 0과 1로 표현되는 신호에 불과한 비트는, 생각보다 훨씬 깊이, 현실 세계에 기반하고 있었다. 개별 콘텐츠야 다르다고 해도, 비트 자체는 물적 기반 없인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돈이 없이는.
어쩌면 그냥 받아들이는 걸까
우리가 몰랐다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대부분 기록 매체 손상으로 인해 소중한/소중하지 않은 자료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는 다를 거라 가볍게 믿었을 뿐이다. 무료, 무료, 무료를 외치며 인터넷은 보급됐으니까. 무료로 쓰는 인터넷은 무료이기에, 서버를 쥔 사람이 가볍게 날려버릴 수도 있다고, 미리 그걸 상상하며 글을 쓸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그냥 받아들이는 건지도 모른다. 예전 PC통신, 프리첼, 싸이월드, 이글루스 블로그처럼, 원래 웹은 돈이 안되면 없어지는 거라고.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브런치도, 유튜브도, 틱톡도- 돈이 안되면 그냥 사라질 거라고. 그걸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너희들이 쓰는 걸로는 돈이 안돼-하고 결정하는 순간, 깡그리 사라질 거라고. 아니면 간단한 오류 하나로, 모든 것이 날아갈 수 있다고.
메멘토 웹 모리. 디지털의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쉽다. 비트 자체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많은 SF 영화에서 디지털 자아가 자신을 보관할 현실 개체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는 이유도, 죽음에서 도망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인터넷이 AI보다 소중하다
받아들인 다음에는 무엇이 남을까. 모르겠다. 그저 카르페 디엠. 현재를 충실히 즐기고 잊어버리면 그만일까. 어차피 컴퓨터와 네트워크는 복구가 된다. 그러니 슬펐던 과거는 잊고 그냥 현재만 바라보며 사세요-하면 그만일까. 어떤 사고가 생겨도, 일부 기업에 집중된 인터넷은 절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아니면, 더 큰 소를 잃기 전에 다시 외양간을 고쳐야 할까. 하나는 분명하다.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버그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상호의존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인터넷 인프라는 AI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우리가 평범하게 쓰는 여러 앱과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이, 생성 AI를 개발하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중요하다. 인터넷 회복력이 강한 사회가 좋은 사회다. 동시에, 시스템이 망가져도, 연필과 종이로라도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대책이 존재해야 한다.
다른 한 편, 이제 진짜 어딘가에 웹 도서관이 생길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 망한 미디어가 발행한 기사를 수집해 저장하는 장소가 공식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망할 인간들이 채가서 똥덩어리 AI 기사로 도배하기 전에, 후손들이 볼 수 있게 보관 기록해 두는, 그런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