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억명 중에 나는 왜 나야?
내 딸이지만 그 조그만 속에서 무슨 생각과 상상들을 하는지 기가막힐때가 많다.
우리는 자기 전에 침대에 나란히 누워 별별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자기 전 베드타임은 우리에게 참 깊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언젠가 한국은 5천만명이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줘더니 미국은 몇명이 살고 있냐고 묻는다. 미국은 2억명고 전 세계 인구수가 77억명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줬더니 며칠 후 베드타임에
엄마, 나는 진짜 궁금한게 있어.
근데 내가 궁금한걸 정확하게는 표현할 수가 없어.
77억명의 다른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왜 나인거야?
라고 묻는다. 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해. BTS도 궁금해 하는거야. 너라는 사람은 너가 듣고 말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토대로 만들어지는거야, 너가 너일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거야. 라고 일단 말해두긴 했다.
7살 아이의 이 심오한 질문에는 몇가지 시리즈가 있다.
죽음은 뭐야?
나는 어떻게/왜 태어난거야?
최초의 사람은 누구야?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진거야?
아이가 이런 질문들을 할때마다 이 문명사회에 신이, 종교가, 철학이, 예술이, 과학이 왜 존재하는지가 명징해진다.
아이가 이런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4살때부터였다.
아빠와 영문도 모른채 이별하게 되면서 아이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빠는 죽은거야? 죽으면 어디로 가는거야? 죽는건 뭐야?
죽음 다음으로는 탄생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작은 아마 아이가 나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한테서 태어났는데 엄마는 어디서 태어났지? 로 말이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일 처음의 엄마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최초는 어떤 형태인가?
그 이후에는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파트는 어떻게 만드는건지, 신발과 옷을 어떻게 만드는건지를 궁금해한다.
이 모든 질문은 '기원'을 알고자 함이다. 왜일까? 왜 기원을 이제 막 세상에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7살 아이조차 탐구하는 것일까?
아이를 키우면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새삼 실용적으로 되새기게 된다. 아직 독립적인 자아가 만들어지지 않은, 많은 경험을 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도 자신도 모르는 DNA의 흔적들이 있다. 이 흔적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그럼 나는 누구인지를, 나의 존재 가치는 무엇인지를. 풀리지 않는 물음들을 계속해서 가지고 살게 한다. 그 기원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나라는 존재를 통해 이것이 운반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렴풋이 안다.
어느날은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그냥 죽어버리는게 나을 것 같아.
쳇바퀴 돌듯(유치원-집) 반복되는 삶을 사는데 왜 사느냐라는 의미었던 것 같다. 충격은 아니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직은 많이 제한되어 있고, 나의 존재 가치를 사랑을 받는 일에서만 찾을 수 있고 달리 증명할 길이 없다면. 그래서 왜 사는건지 잘 모르겠다면. 왜 그 조그만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음이라는 장소까지 다다렀는지 이해한다.
그럼에도 살아내야하고, 사랑하는 나의 딸이 그 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