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아이들이 죽은 아기 생쥐를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막대기와 작은 나무판자를 이용해서 이 불쌍한 죽은 아기 생쥐를 옮겨 “죽은 자들의 나무 L'albero degli morti"로 옮겨갔다.
나무판자와 막대기를 사용해서 죽은 아기 생쥐를 옮기고 있는 Federico
죽은 자들의 나무란, 이 나무 밑에 아이들이 숲에서 발견한 죽은 동물들을 데려와 땅을 파고 묻어주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나무이다. 이 숲에서는 새롭게 새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고, 생명이 다한 동물들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들의 손에 옮겨져서 죽은 자들의 나무에 도착한 아기 생쥐. 어떻게 묻어 줄 것인지 묻자, '나무 상자에 넣어서 묻어 줄 것이다, 흙을 파서 묻어주고 돌들을 위에 올려 둘 것이다, 흙을 파서 묻어주고 꽃을 위에 올려 줄 것이다 '등등의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이렇게 한참을 논의하는 가운데, 율이는 너무도 쉽게 손으로 흙을 파서 죽은 아기 생쥐를 넣어 주더니, 간단하게 흙으로 묻어 주었다. 그리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한 뒤, 아이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생쥐를 포함해서 여태 죽은 자 들의 나무에 묻힌 동물들은 2마리 새들과 1마리 병아리, 2마리 생쥐들이었다.
어떻게 묻어줄 것인지 논의 중인 아이들(왼쪽)과 아기 생쥐를 묻어주고 있는 율과 아이들(오른쪽)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 이 모두에게서 너무도 멀어져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옛날 시절에만 해도, 누군가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장례를 가족들이 집에서 준비하고, 음식들을 준비하고, 동네 모든 사람들이 죽은 이를 추모하러 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아기들을 집에서 받는 일 또한 당연한 일로, 산모가 병원이나 산후 조리원 등에 가는 게 아니라, 산파가 산모에게서 아기를 받으러 집에 들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병원이 체계화되고, 의학 기술이 발전해 나가면서, 죽음의 결정과 책임을 본인이 아닌 의사에게 맡기게 되었고, 혹여 라도 누군가가 집에서 자연사라도 하게 되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 판이 되어 버렸다. 모든 산모들이 집에서 아기를 낳는 것을 두려워하고, 혹여 라도 너무 커다란 고통이 동반할 경우에는 병원에서 제왕 절개 수술을 쉽게 권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내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본다던가, 죽음에 관해서 말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또한, 나의 동생이 태어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아이들은 손에 꼽힌다.
그렇기에, 이 나무를 볼 때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 아이들이 이 숲에서 마주하게 되는 새 생명들과 사라져 가는 생명들을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 곳에 나는 감사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때론 조용히, 때론 시끌벅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