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요리에서 죄책감 덜어내기
"오늘 아침밥은 뭐야?"
10살 따님이 물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여차하면 밥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저 나이 때면 달고 입맛에 맞는 음식만 찾기 마련인 건 알지만,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힘들게 이것저것 챙겨줘도 결국에는 시리얼이나 빵을 찾을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론 아침에 간편한 음식을 먹는 건 좋다. 바쁜 아침에 입맛도 없을뿐더러, 반찬에 국이며 밥을 여러 차례 떠먹으려면 번거롭기도 하다. 우유에 빵이나 시리얼을 곁들이면 편리하면서도 꽤 괜찮은 아침식사다.
문제는 빈도다. 매일 아침마다 빵 쪼가리를 물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쪽이 쿡쿡 찔린다.
84년생인 나는 독립을 하기 전까지 매일 아침 엄마가 챙겨 준 따뜻한 밥과 국을 먹고 자랐다. 그건 내게 당연한 일상이자,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거였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간편식만 제공하는 건 엄마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와 도리를 져버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유기농이니 뭐니 해도 아이들 입에 따뜻한 밥과 국이 들어가야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대부분 엄마들의 공통된 마음이 아닐까.
엄마의 마음으로 콩나물을 다듬고, 시금치를 데치고, 도토리묵 양념장을 만들고, 생선을 구워서 한상을 차려도 되돌아오는 건 실망뿐이다. 먹으라는 채소에는 젓가락이 좀체 가지 않고, 도토리묵은 쓰다며 한 번 먹고 만다. 생선살을 발라서 밥그릇에 올려보지만, 그만 좀 올리라고 타박을 듣는다. 어른 숟가락으로 하나 가득 정도로 뜬 밥은 너무 많다며 남긴다. 몇 번 국물만 떠먹은 국 안에 굵직한 건더기가 초라하게 남는다.
뭐든 손으로 하는 건 정성이 깃드는 법이다. 정성이 깃들려면 시간을 쏟아야 하고.
아이들에게 외면당한 국과 반찬이지만 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음식을 하는 동안 내내 서 있어야 하는데, 이때 쓰는 체력도 상당하다. 재료를 사고, 다듬고, 끓이고 볶아야 한다. 간이 맞는지, 재료는 적당하게 잘 익었는지, 양념이 잘 버무려졌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요리를 쓰윽쓰윽 잘하는 만능 주부에게는 간단하겠지만, 나에게는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렇게 차려진 식탁을 반기지 않으면 마음이 쓰리다. 주섬주섬 냉장고에 들어간 반찬은 몇 차례 식탁에 더 오르다가 결국 음식물 쓰레기가 되고야 만다.
그렇다고 매번 외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5인 가족이 한 달간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면 거의 한 사람의 월급만큼의 비용이 들 수도 있다. 또, 사 먹는 음식은 아무래도 자극적이고 기름지다. 조미료를 얼마나 넣었는지, 조리는 정말 위생적으로 되었는지 확인하기도 힘들다. 더군다나 배달음식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회용 쓰레기를 보면, 나의 게으름의 대가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과 도시락을 먹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나들이를 갈 때면 가끔 이용하기는 하지만, 외식보다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라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 아이들을 너무 일찍부터 일제식 도시락 맛에 길들이는 게 아닌지 불안함이 생겼다. 이러면 내가 지향하는 A급 엄마의 삶과 더욱 멀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알지 못할 두려움이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몸은 편하고는 싶지만, 아이들에게 정성을 맛 보여주고 싶은 괴리감이 늘 불편했다.
어느 날 아침, 프렌치토스트마저 외면당했다. 두툼한 식빵에 계란물을 입히고, 녹인 버터에 구웠다. 나름 맛있다고 혼자 두 조각이나 먹어치운 토스트였다. 아이들은 한 입 배어 물더니, 맛이 없다며 먹지 않겠다고 했다. 나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그럼 너희가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먹어."
아이들을 아침부터 쫄쫄 굶길 수는 없었다. 시리얼이든 뭐든, 든든히 배를 채워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낡은 신념 같은 거였다.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을 아이들의 위장에 넣어주면, 내가 A급 엄마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정성껏 만든 나물이 냉장고에서 쉬어가고, 아직 채 썰리지 않은 채소들은 시들어가고, 다 먹지 못한 국은 여러 차례 싱크대에서 비워졌다.
나의 시간과 노력,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도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아이들은 내가 만든 것보다 밖에서 사 온 떡볶이를 더 맛있어하고, 고깃집의 양념갈비를 정신없이 먹었다. 다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치킨이라 라면을 외쳤다. 밥을 다 먹어야 치킨을 시켜준다는 말에 꾸역꾸역 밥을 욱여넣었다. 물론 내가 만든 모든 요리를 아이들이 싫어한 건 아니었다. 한 시간 넘게 졸인 등갈비를 맛있게 뜯었고, 콩나물 무침이 아삭아삭하다면서 칭찬했다. 달걀말이가 부드럽다며 여러 번 먹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문제는 빈도다. 엄마표 요리보다 사서 먹는 음식이 맛있는 때가 더 많다는 것. 그건 가끔은 서글픈 일이었다.
엄마표 요리가 외면당하는 것이지, 엄마를 외면하는 게 아니란 걸 잘 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표 식탁 앞에서 빵이나 치킨을 찾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또 자존감이 무너진다.
사실 난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잘 먹어주면 흥이라도 날 텐데, 기운 빠진 엄마의 손에서 멋들어진 요리가 탄생하긴 어렵다. A급 엄마라면 인터넷과 책을 모조리 뒤져서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레시피를 찾아내 매번 식탁에 올릴 거다. 난 그럴 기력도 여유도 없다. B급 엄마답게 내가 뒤진 건 인터넷이었다. 뭐, 맛있는 반조리식품 없나 하고.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냈다. 전국 방방곡곡의 음식점에서 하는 요리가 포장 주문된다는 사실이었다. 음식은 배달어플로 주문하는 걸로만 알았는데, 여러 지역의 맛집의 음식이 포장되어서 비조리 상태로 배송되었다. 물론 조리 전이기 때문에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가격이 쌌다. 이런 음식점들을 파는 사이트도 여럿이었다. 갈비, 불고기, 돈가스, 만두, 김치, 떡 등 웬만한 음식은 다 주문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산지직송 과일이나 해산물도 있었다. 여기서 제품을 주문하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인다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굽고 익히는 과정에서 요리하는 시늉이라도 내면서 엄마의 정성을 살짝이나마 담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봉지 속에 담긴 오리고기를 꺼내어 볶았다. 이미 양념까지 다 같이 담겨있었다. 내가 한 건 양파, 당근, 대파를 썰어 넣고 익을 때까지 익힌 것뿐이다. 참기름과 깨를 첨가하고, 예쁜 접시에 담아 상을 차렸다. 상추랑 쌈장까지 곁들이니 그럴싸한 밥상이 완성됐다. 평소에 잘 안 해주는 메뉴라서 그런지 아이들도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음 날 해 준 B사의 곤드레 나물밥은 프라이팬에 달달 볶기만 하면 되었다. 함께 내장되어 있던 소스를 밥에 뿌리고, 위에는 스크램블 에그를 올려주었다. 아이들은 맛있다며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요리하는 나의 노력을 대신해 준 그 누군가에게 감사했다. 재료를 사고, 손질하고, 맛 평가에 전전긍긍하는 노력에 비하면 손쉬운 방법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물론 돈이 들기는 하지만, 직접 장을 보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나는 시간과 체력을 아꼈고, 아이들과 식탁에서 더 먹느니 덜 먹느니 하며 힘겨루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기까지 애쓴 만큼을 아이들이 알아주길 바랬던 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엄마가 되기 위해 밥상을 차린 건 내 선택이지 아이들이 원한 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음식을 하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주길 바란 건 욕심이 아녔을는지. 엄마표 밥상을 차려야만 좋은 엄마라는 죄책감을 덜어내고 나니, 아이들의 표정이 보였다. 아이들이 왜 잘 안 먹는지 의아해하고 실망하던 내 모습도 변하고 있었다.
'그래. 조금 덜 먹을 수도 있는 거지.' 하고.
여전히 아이들이 잘 먹는 게 좋다. 어쩌다 한 번씩 밥 좀 더 달라고 하면 기분이 좋아서 쪼르르 전기밥솥으로 달려간다. 아이들 입에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 내 배가 부른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아이들에게 먹기를 강요하기보다는 차라리 요리를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요리를 아예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다만, 엄마표 요리에 집착하지 않고 때론 외식도 하고, 반조리 식품을 주문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련다. 중요한 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니까.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글이다. <옛날 꽃날 엄마>의 명언이라는 데, 보자마자 데구루루 굴러와 마음에 박혔다. 나만 이렇게 스스로 B급 엄마라 치부하는 건 아니라는 위안도 살포시 들었다. 시를 읽으며,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며 또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음만은 대장금인데
엄마 손은 비비고 왕교자를 돌리고 있다
마음만은 오은영인데
엄마 입은 소리 지르고 있다
마음만은 맹자 모인데
엄마 손은 유튜브 핑크퐁 검색해주고 있다
마음만은 캐리이모인데
엄마 눈은 핸드폰만 보고 있다
뭐든 다 해주고 싶은데 미안하다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나도 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