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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엄마 Aug 20. 2021

엄마라는 이름의 덫

뫼비우스의 띠 혹은 시시포스의 형벌


  오랜만에 TV를 켰다. 뭐 재미있는 게 없나 염탐하는 하이에나의 눈빛으로 채널을 여기저기 돌렸다. 그러다 한 관찰 예능에 시선을 뺏겼다. 요새는 그렇다. 골치 아프게 추리를 하거나, 극과 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보면서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 사건 사고로 가득 찬 뉴스는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저 물 흐르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관찰 예능이 좋다.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멍하니 TV를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연예인의 일상도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위안을 넌지시 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기치의 해방 타운은 최근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설명을 살펴보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한 기혼 셀러브리티들이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결혼 전의 '나'로 돌아가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

    

  6화의 주인공은 18개월 아이를 둔 배우 김산호였다. 밀착 육아를 하면서 육아 우울증이 올 정도였다는 그는 해방 타운에서 1박 2일의 자유 시간을 얻었다. 그가 한 일은 특별하지 않았다. 원래 취미였던 서핑을 하고, 곰탕라면을 끓여먹고, 소파에서 영화를 보고 낮잠을 잤다.


 미혼일 때는 일반적으로 하지 못하는 활동을 하는 순간이 특별하다. 해외여행을 간다든지, 평소 안 하던 운동을 한다든지, 새로운 음식을 맛 본다든지.


   아이를 낳은 순간 특별함의 기준은 달라진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배우자로서, 부모로서 해야 되는 의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솟아오르는 욕망에 따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아이나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저 혼자서, 원하는 때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오죽하면 해방 타운으로 향하는 그가 동요가 아닌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실에 울컥했을까.





 

  기혼자, 더군다나 어린아이까지 둔 사람은 알 거다.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절실한지. 결혼 전에도 마냥 한가한 건 아니다. 하지만 미혼일 때는 남는 시간을 내 자유 의지에 따라 활용할 수 있었다. 잠을 잘지, 자기 계발을 할지, 또는 인터넷 서핑이나 SNS를 하는 여유를 즐길지 뭐든 스스로 결정하면 되었다.


  결혼 후에는 마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만은 없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마음대로 하기 힘들다. 인생의 공식적 동반자이자, 남은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타인일 배우자의 의견이 중요해진 터다.



  부부의 신뢰의 바탕은 정보의 공유에서 나온다.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귀가는 몇 시에 할 것이며, 누구를 만나는지 배우자와 소통하는 건 기혼자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배우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기어코 터지고야 마는 다툼을 예방하기 위한 최선책이기도 하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지인 동시에 인생의 족쇄다.


  아이를 낳으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부모는 아이를 위한 24시간 콜센터가 된다. 주린 배를 채워주고, 숙면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다양한 요구를 해소하기 위해 늘 분주한 민원처리 창구가 되는 셈이다. 물론 이는 사랑과 모성애(또는 부성애)를 기반으로 한다.


  아이를 돌보는 데 절대적인 함량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모의 개인적인 욕구나 사회활동을 일정 부분 제한하게 된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자질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마저 하게 된다. 새로운 생명을 길러낸다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숙명 앞에서 결핍된 자신의 자질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엄마, 혹은 아빠로서 일그러진 자화상을 형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이게 내가 B급 엄마라고 자칭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다. 세상에서 원하는 엄마의 기준이나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좋은 엄마의 기준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마라면 유기농의 좋은 음식을 먹이고, 온종일 아이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내 자유 시간보다는 아이의 올바른 성장 발달을 돕는데 힘을 기울이며,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할 것만 같았다. 자신의 꿈은 약간 뒷전으로 하면서까지 아이가 우선으로 해야만 올바른 엄마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위해 제한한 개인적 욕망은 어떤 형태로든 비집고 나왔다. 때론 지쳤고, 때때로 울적했다. 내가 엄마이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일 거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행복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나를 옭아매는 시간에 답답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때로는 힘겨웠다. 눈을 뜨자마자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와 놀아주거나 책을 읽어주고, 틈틈이 빨래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해야 했다. 내 손이 닿지 않고 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는 나를 성장시키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면서 나의 몸과 정신이 단련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없었다. 직무와도 관련이 없었다. 바닥을 쓸고 닦고, 밥을 차리고 치우는 반복되는 일상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의무에 가까웠다. 해도 해도 티 나지 않는 집안일과 치우고 돌아서면 어질러진 방 안은 끝없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시포스의 형벌 같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제우스가 보낸 사신을 묶어 두는 등 신들을 기만한 행동으로 벌을 받게 된다. 커다란 바위를 산 꼭대기에 밀어 올리고,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야 마는. 그가 받은 벌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무거운 돌을 나르는 고됨, 애써 나른 돌이 원상 복귀되는 걸 바라봐야 하는 허무함, 또다시 처음부터 모든 걸 시작해야 하는 고통.


  육아도 그렇다. 매일이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옹알이를 한다거나, 한 발짝씩 걷는다거나 하는 일은 비스름한 일상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 때쯤 일어난다. 어쩌면 엄마로서 가장 필요한 소양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견디는 힘일 것이다. 수련을 하듯 고단한 일상을 지속하는 힘. 쉬운 듯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저녁에 해방 타운에 김산호의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중 한 명은 배우 박정표인데, 결혼 11년 차이자 초등학교 3학년의 자녀를 두었다. 아이를 다 키워서 이제 해방되지 않았느냐는 친구들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해방이라는 건 없어. 내가 죽어야 끝난다고 해야 하나?
 애가 태어났잖아. 내가 죽어야만 끝나.


   그의 말에 말 그대로 빵 터지고 말았다.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서. 돌덩이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뒷모습이 떠올라서.






  큰 애가 딱 초등학교 3학년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시기지만,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 여전히 아이 혼자 집에 남겨둘 때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밥부터 간식, 옷, 숙제, 교우관계 등 신경을 써 주어야 할 부분이 많다.


  아이가 결혼을 한 들 달라질까. 지금의 내가 엄마에게 하듯, 나의 아이도 때때로 손주를 맡기고 반찬을 가져가기도 할 거다. 삶에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을 의논하기도 하고, 살다 얻은 상처를 그대로 내놓은 채 울먹일 때도 있을 거다. 아이는 탄생과 동시에 부모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존재다. 그야말로 죽어야만 끝이 나는 끈끈하고도 소중한 관계.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많은 품이 들고, 때론 개인적인 욕구의 좌절로 고달플 때도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겉보기엔 엄마가 손해 보는 기울어진 관계 같지만, 실은 육아를 통해 얻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서, 작은 손을 잡으면서 느껴지는 심장의 저릿한 울림이 말하고 있다.


그래, 엄마니까. 오늘도 버틸 수 있어.

 

  또다시 엄마라는 굴을 파고 들어간다. 엄마의 역할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지긋지긋하기만 하다거나 형벌처럼 여겨지는 것만은 아니다.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한 명의 인간으로 오롯이 성장해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도 엄마라는 이름의 덫을 놓고 스스로를 가둔다. 눈물 나도록 힘겹고도 행복한 그 두 글자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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