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도널드 데이빗슨의 '객관, 상호주관, 주관'이라는 엄청난 제목의 책이 시간이 흘러 낡아가고 있다.
어렴풋이 그 제목이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 권 구입했지만, 그 책을 시도하기에는 내가 지극한 한량이 되어야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책 제목을 볼 때마다, 내 나름대로 저 단어들의 뜻을 헤아리며, 내 멋대로 논리를 전개해 보기로 했다.
잘은 몰라도 우리는 '객관적이다' 또는 '주관적이다'라는 말이 어떤 뜻이지 정도는 대체로 알고 있다. 심지어, 가장 국가적인 시험과 인생을 결정짓는 수많은 시험 문제들이 '객관식' 또는 '주관식'으로 출제되고 있다.
그 문제들의 유형을 통해 '객관'과 '주관'의 본래의 뜻을 무시하고, 문제 유형에 따라 설명하자면, '객관식'이라는 말이 있으니, '객관'은 문제 풀이를 하는 사람이 좀 편하게 4-5개의 보기에서 골라내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골라내는 작업이 어떤 경로를 통하더라도, 풀이자는 결론적으로 각 보기를 '결정'하는 과정을 겪게 되므로, 결과는 통계적 요소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고, 그 결정 확률에 따라 출제자 또는 감독자는 풀이자(또는 수험생)의 대체적인 '결정 성향'을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다양한 지표로 도출되며, 그렇게 작성된 값은 표준화되어, 평가의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주관식'은 '객관식'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출제되는 문제가 묻는 답의 범주가 대체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답안을 작성하는 방식이나 유형에 대해서, 아주 약간 또는 매우 자유로운 범주까지 지정해 줄 수 있다. 따라서, 결정적인 단답형이 아니고서야, 주관식의 점수는 출제자 또는 그 보조자들이 채점을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관점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점수의 범주를 갖게 되며, 통계적 지표로 환원된다.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단답형 주관식'은 진정한 주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출제자가 '채점의 편의성'이라는 단순한 의도에서부터 '정치적 담론 형성'이라는 진지한 목적까지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제한된 선택'이라는 '객관식'이고, 단답형 또한 그 보기의 숫자는 커지더라도 결국 제한된 선택의 범주를 넘지 못하므로, 위에 기술한 나의 자의적 설명대로라면, 그것도 결국 객관식이다.
나는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단어에 이렇게 순응하고 이해해 왔건만, 저 책의 제목에 이상한 단어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상호주관'. 그 단어 덕분에, 나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더 엄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수준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보체계가 파편화되고 분절화되었는 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상호주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를 적어 놓는다면, 우리가 보통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다'라고 말할 때의 객관은 사실 '상호주관'적인 것이고, 우리는 어느 정도의 주어진 집단 내에서의 아주 기본적인 타협이 형성되지 않는 한, 거의 모두 '상호주관'의 범주에 빠지게 된다. 다른 말로, 실은 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소통을 통해 형성된 관계 당사자들끼리의 주관적인 판단의 합의가 '객관적'으로 해석된다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페북에 쓰는 것은 내 맘대로 쓰는 것이고, 언어분석철학자의 엄밀한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엉터리일 지도 모른다는 자의적인 해석에서 던져놓고 싶은 담론은 이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객관'과 '주관' 그 사이의 어느 중간적인 것이 있고, 그것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에 의존한 것이며, 그 효과는 당사자가 바뀔 때마다 변형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매우 관계적이고 - 다시 말해, 어떤 특정 그룹 내에서만 소통되고 획득 가능한 합리와 객관의 다른 이름이 존재할 것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객관'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다시 해석된다. 우리 모두의 어떤 관계를 모두 관통하는 절대적 '객관'은 인간 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그 '객관'을 가장하거나 그것을 강요하는 주체가 존재해 왔고, 그래서 각 개인은 '일정한 기간' 동안 꾸준히 강요된 '예상 결과('보기'의 다른 이름)'를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 상황에 대하여, '선택지'라는 이름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동시에 골라내게 되며, 그 안의 보기들은 동등한 수준의 가치로 인식되면서, 때에 따라서는 시시한 것과 엄중한 것의 가치가 전도되기도 한다.
그것은 출제자의 의도이며, 출제자의 권력이 다양한 형태로 퍼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 Quiz는 전형적인 '객관식'이다. Quiz의 기원은 어느 장난치들의 것이겠지만, 권력자의 질문은 모두 quiz다. 간단하고 명쾌하며, 매우 정교하다. 그러나, 의도는 분명하다. 정답을 맞히는 것일까, 의도를 맞춰야 하는 것일까.
12년간의 학교 교육에서 훈련된 '객관식', 그것은 정해 놓은 몇 가지 길에서 우리의 사고를 가두었다. 이후에도 영어 시험, 자격시험, 심지어 고등고시 1차 시험까지.
어머니 성화에 당시에는 '기술고시'라고 불리던 기술직 행정고시 1차를 본 적이 있다. 모두가 객관식이었다. 그래도 생물학이나 영어는 보기를 보자면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국사 과목은 정말 나에게 힘든 관문이었다. 결국 국사 과목의 과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국사 공부를 하자고 학원도 가 보았지만, 결국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을 읽기보다, 강만길 교수의 책 두 권을 읽고 만 나는 막연하나마 '이런 시험은 다시 보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강의평가 점수가 아주 좋지 않음에도, 꾸준히 독서 숙제를 내어 주고, 용어 정리를 시키며, 모든 시험문제는 서술형으로 낸다(간혹 단답형을 주기는 하지만, 오픈북으로...)
현대 우리가 겪는 문제들에 대하여,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전례 없는 위기가 다가온다고. 다시 말해, 익숙한 '보기'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 우리는 지금 네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 중 무엇을 해야 할까요? 투표를 해 보니, 1번에 20%, 2번에 50%, 3번에 10%, 4번에 10%... 그리고 10%는 아예 답을 하지 못했군요.'라고 할 때, 우리는 2번을 선택해야 할까? 그것은 '객관식'적 사고일 테고, 아예 답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주관식적 - 사실은 객관적' 사고일 테고, 엉뚱하게도 1번이나 3,4번을 선택한다면, '상호주관적'인 것일까..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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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를 쓰신 분의 독서 노트가 훨씬 더 정교하고 명확할 것이다. 난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제목만 보고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며, 이 분은 읽었다. 그런데, 읽지 않았어도 묘한 공통의 이해가 있으며, 그것을 나는 임의대로 이 사회가 문제 앞에 무기력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활용했다.